유럽과 북미의 주요 공연장은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를 한 시즌으로 운영한다. 1년 단위로 기획 프로그램을 구성해 일찌감치 발표하는 시즌제는 공연장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한편 다양한 패키지 티켓의 사전예매를 통해 충성 관객을 만든다. 다만 최근 유럽과 북미에서 분기별 시즌제를 운영하는 공연장이 등장했는데, 부유한 노년층의 연간 패키지 티켓 독점을 억제함으로써 젊은 층의 유입을 확대하는 한편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불확실성에 발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는 LG아트센터가 2000년 개관과 함께 처음 시즌제를 도입한 이후 2010년대 국립극장과 세종문화회관이 시작하자 지역 문예회관도 뒤따르고 있다.
그런데, 유럽과 북미에서 권위 있는 공연장일수록 시즌제 못지않게 여름 휴가 기간인 7~8월 오프 시즌 운영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경직된 시즌제 운영이 자칫 공공적 성격의 공연장을 대중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7~8월 실내나 야외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공연 페스티벌을 여는가 하면 평소 공연장의 정체성과 다른 성격의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국내 주요 공연장 가운데 7~8월 오프 시즌을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한다는 평가를 받는 곳은 국립극장이다. 국립극장은 매년 7월 퓨전 국악 중심의 ‘여우락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1회는 2010년 9월 열흘간 열렸지만 이듬해 2회부터 7월로 옮겨 3주간 열리는 여우락 페스티벌은 국악의 스펙트럼 확대 및 관객 소통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전속단체로 거느린 국립극장이 2010년대 들어 전통에 기반을 둔 컨템포러리 극장으로 새롭게 변신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또 예술의전당도 이름을 여러 차례 바꿨지만 매년 7~8월 어린이 공연 페스티벌을 여는 것이 학부모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세종문화회관도 올해 오프 시즌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바로 동시대를 선도하는 최고 아티스트들을 만난다는 컨셉트의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 넥스트(Sync Next)’다. 세종문화회관은 국내 최고 극장 전문가로 꼽히는 국립극장장 출신의 안호상 사장이 지난해 10월 취임한 이후 변화를 꾀하고 있는데, 지난 2월 기자간담회는 안 사장의 운영 전략이 공개된 자리였다. 핵심은 전속 예술단 제작공연 중심으로 봄 시즌과 가을·겨울 시즌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한편 여름에는 싱크 넥스트를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싱크 넥스트의 성공을 통해 예술단의 제작 공연까지 견인하겠다는 미션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 내 블랙박스 극장인 S씨어터에서 지난 6월 23일 개막해 9월 4일 폐막한 싱크 넥스트는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싱크 넥스트는 원래 12팀의 아티스트가 총 13개 작품을 51회 선보일 예정이었다. 참가 아티스트로는 안은미, 백현진, 이날치,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태싯그룹, 김치앤칩스, 김혜경, 박다울, 전윤환, 창창 프로젝트에 전속단체인 서울시뮤지컬단과 서울시오페라단이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싱크 넥스트의 실제 공연 횟수는 출연자의 코로나19 감염으로 공연이 취소된 창창 프로젝트(3회) 외에 안은미의 ‘은미와 영규와 현진’이 티켓 판매 저조로 인한 취소 1회까지 더해져 47회였다.
싱크 넥스트의 저조한 티켓 판매는 개막을 앞두고 패키지 티켓이 잘 팔리지 않은 데서 이미 예상됐었다. 실제로 막이 오른 후 싱크 넥스트의 여러 공연이 객석의 절반은커녕 30%도 차지 않는 경우도 꽤 있었다. 특히 김혜경의 ‘자조방방’, 태싯그룹의 ‘ㅋㅋ프로젝트’, 전윤환의 ‘자연빵’, 김치앤칩스의 ‘콜렉티브 비해비어’ 등의 공연에서 객석이 많이 비었다. 매진이라고 보도자료를 냈던 서울시오페라단의 오플레이 ‘파우스트’도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 형태로 사용할 때 최대 320석이던 S씨어터를 200석이 나오는 무대 형태로 바꿨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종문화회관이 서울시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싱크 넥스트의 제작비에는 7억68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이 투입됐다. 봄 시즌 프로그램에서 디자이너 정구호를 투입한 서울시무용단의 ‘일무’ 외엔 주목받은 예술단 공연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여름의 싱크 넥스트는 올가을 2년 차에 들어서는 안호상 사장의 미션을 위해 성공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싱크 넥스트가 관객의 외면을 받았던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컨템포러리 시즌’이라는 애매한 정체성과 함께 출연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그다지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한 탓이다. 다양한 장르를 보여주는 것은 장점일 수 있지만, 전속 단체의 작품부터 갤러리에 어울리는 오디오 비주얼 아트나 퍼포먼스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 어떤 관객층에도 소구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으로 더욱 크게 작용했다. 특히 이날치,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박다울 등 일부 아티스트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이나 서울문화재단 쿼드 개관 페스티벌 등의 무대에 섰던 만큼 신선한 매력을 주지 못했다. 게다가 싱크 넥스트에서 선보인 이들의 작품 역시 예전 작품을 갈라 형태로 보여주거나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물론 싱크 넥스트는 이번이 처음인 데다 ‘컨템포러리 시즌’이라는 타이틀답게 유연하게 변화할 가능성을 남겼다. 예를 들어 올해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안은미를 일종의 ‘주빈 예술가’로 놓았다. 이에 따라 안은미 그리고 그와 가까운 예술가들의 작품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내년에는 주빈 예술가를 일찌감치 선정한 뒤 그에게 예술감독 역할을 부여해 극장과 함께 프로그래밍하도록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