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한 토목업체의 로비 창구 역할을 하다가 징역형이 확정된 전직 고위 공무원의 퇴직수당과 연금을 환수·감액 조치한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현직에 있을 때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이주영)는 전직 제주특별자치도 시설직 고위공무원 A씨가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낸 퇴직연금 환수 처분 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씨는 2012년 6월 30일 명예퇴직과 동시에 곧바로 토목업체 B사의 부회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해당 업체 대표로부터 퇴직 한 달여 전 ‘현직에 있을 때 알던 제주시, 서귀포시 공무원들을 상대로 B사가 보유한 특허공법이 지자체 공사에 선정되도록 알선·청탁해주면 급여 등 명목으로 대가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
A씨는 관급공사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에게 전방위적 로비를 했고, 2012~2015년 제주시와 서귀포시 등지에서 이뤄진 수해상습지 공사 6건에 B사 기술이 반영되도록 했다. A씨는 2014년 1~2월 제주시 교량공사 담당 과장과 직원을 만나 B사 자재 납품을 청탁하며 각각 1000만원과 500만원을 주기도 했다.
B사는 2012년 7월부터 2017년 5월까지 A씨에게 알선 등의 대가로 3억1380여만원을 지급했다. 이후 2018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및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A씨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았고 같은 해 10월 형이 확정됐다.
형 확정 후 공단은 A씨의 퇴직수당과 퇴직연금을 절반으로 제한하고 초과 지급분 6700여만원을 환수하는 조처를 내렸다. 공무원연금법은 전·현직 공무원이 재직 중 직무 연관 행위로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 받을 경우 퇴직급여와 수당을 최대 50%까지 감액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A씨는 범행 시기가 퇴직 이후였으므로 해당 시기 일을 이유로 연금 환수·제한 조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A씨 손을 들어줬다. 문제가 된 두 범행 중 뇌물공여 혐의 부분은 2014년에 발생해 퇴임 후 저지른 것이 명확하다며 판단에서 제외했다. 재판부는 알선수재 혐의도 “원고가 공직에서 퇴직한 후 구체적 영업 청탁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하기 시작한 2012년 7월 이후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A씨가 현직 공무원이었고 토목업체의 영입 제안이 있었던 2012년 5월 시점을 지목해 “당시 원고가 구체적 알선을 청탁받았다거나 금품제공을 약속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별다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입 제안을 승낙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구체적인 알선수재죄가 이뤄졌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