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유포 증거있는데… 거북이 수사에 ‘엘’이 사라졌다

입력 2022-09-01 18:34 수정 2022-09-01 21:17

‘제2의 n번방’ 사건 주범 ‘엘’(가칭)의 피해자 중 한 명이 경찰에 피해를 신고했지만 “유포 정황이 없다”는 이유로 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이 아닌 일선 경찰서에서 8개월가량 수사를 맡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 본격화가 지체되는 사이 엘은 자취를 감췄다.

1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엘 성착취 10대 피해자인 A양은 지난 1월 경기도 한 경찰서에 피해 신고를 접수했지만 지방경찰청 단위 수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2020년 3월 ‘n번방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자 경찰은 전국 지방청 사이버수사팀 인력을 확충하는 등 전담 수사팀으로 적극 대응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사건 이관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통상 성착취물 유포 사건은 지방청 사이버수사팀이 수사를 맡는다. 이런 범죄는 확산 속도가 빠르고 피해 규모가 커 전문 지식을 갖춘 수사관이 조기에 수사에 착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A양 측이 지방청으로 사건이 넘어가지 않은 이유를 묻자 당시 경찰 관계자는 “유포 정황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신고 당시 피해자가 낸 증거물에는 엘이 또 다른 피해자의 성착취물을 공유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엘은 A양에게 해당 영상을 보내며 “똑같이 따라하라”고 지시했으며, “모두 내가 지시해서 영상을 찍었다”고 말했다.

현재 엘 관련 사건은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수사 중이다. 첩보를 입수해 추적 중이었는데 최근에서야 일선서에서 A양 사건을 수사 중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관을 요청했다. 사건 초기 경찰 내 공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엘은 지난 5월 활동을 중단하고 자취를 감췄다. 수사기관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간 네트워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수사를 진행한 경찰서 관계자는 “다른 피해자가 아닌 신고자 영상이 퍼진 정황이 확인돼야 유포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데, 혐의가 성립되지 않아 이첩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이날 “성착취물 제작·배포 사범은 원칙적으로 구속 수사를 하는 등 강화된 사건처리 기준을 준수하라”고 대검에 지시했다. 서울경찰청은 용의자 조기 검거를 위해 전담수사팀을 꾸리고 수사팀도 1개팀에서 6개팀으로 확대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