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한지 품질 표준화하고 사용처 확대해야”

입력 2022-09-01 06:02 수정 2022-09-01 06:02
국회입법조사처 발행 학술지 '입법과 정책'에 실린 논문.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기록문화 강국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록물이 16건이다. 일본(7건)은 물론이거니와 역사가 유구한 중국(13건)보다도 많다. 등재 건수가 아시아·태평양권에서는 1위이고, 세계에서도 4위다. 등재 기록물은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새마을운동 기록물 등 현대에 쓰여진 것들도 있지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동의보감’ ‘난중일기’ 등 수백년 전에 제작된 기록물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가 기록 강국이 된 배경엔 선조들의 기록 중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지만 기록을 담은 그릇인 한지(韓紙)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수백 년이 흘러도 기록이 온전하게 보전되는 한지가 없었다면 기록유산의 상당수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지는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하지만 전통한지가 처한 현실은 초라하다. 전통한지 진흥을 얘기하고 매년 많은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한지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31일 펴낸 학술지 ‘입법과 정책’에 실린 ‘전통한지정책의 현황과 문제 분석: 입법방안 도출을 위해’는 전통한지의 실태를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한 논문이다. 저자인 박후근 국민통합위원회 지역소통과장은 논문에서 한지산업의 실태와 한지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지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논문에 따르면 전통한지 제조업체는 급감하는 추세다. 1996년 64개였으나 2016년 말 28개로 줄었고 2021년 6월 말 현재 19개로 쪼그라들었다. 또 업체의 70%가 연매출이 1억원 미만인 영세업체들이다. 전통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를 생산하는 농가 수도 전국에 11개에 불과하다. 수록한지 연간 총생산량도 2017년 10만7714장에서 2018년 9만6762장으로 줄었다.
전통한지 업체에서 한지를 살펴보고 있는 박후근 과장.

박 과장은 전통한지가 위기에 처한 원인으로 진흥을 위한 법적 근거 미비, 관리 체계의 비효율성, 실효성이 떨어지는 관련 제도,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 등을 꼽았다.

전통한지는 중요한 전통문화인데도 진흥 및 지원을 위한 개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공예문화산업진흥법’에 한지를 전통공예품으로 간주해 관련 사업을 시행하고 있고 전라북도와 경상북도 등 2개 광역 자치단체와 전주시·원주시 등 7개 기초자치단체가 한지 조례를 제정했을 뿐 법적 근거가 미흡하다고 했다.

한지 관련 기관들의 사업이 일관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지방자치단체 등이 개별적으로 한지 사업을 시행하고 있을 뿐 정책부분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곳이 없고 전통한지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는 게 박 과장의 주장이다.

품질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봤다. 한국산업규격(KS)의 한지 품질규격은 부실해 2006년 이후 등록업체가 한 곳도 없다. 한지품질표시제도 등록업체수가 2017년 41개에서 2019년 12개로 줄어드는 등 한지 업체들의 만족도가 매우 낮았다. 지류문화재의 수리·복원에 사용되는 한지조차도 품질 기준이 없다고 한다.

전통한지를 생산하는 업체들이 경영난에 속속 문을 닫고 있는데도 이들에 대한 직접 지원은 미미한 실정이다. 정부가 2017년 1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최근 5년간 전통한지 지원사업에 투자한 예산이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341억원인데도 시설장비 구축, 수리 지원, 종이 구입 등 업체에 직접적으로 지출한 금액은 7억원이 채 안 됐다는 것이다.

박 과장은 전통한지 진흥을 위해서는 관련 법 제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21대 국회에 ‘전통한지문화산업의 육성 및 발전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돼 있는데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통한지의 정의에서 주원료를 ‘국내산 닥’, 제조기술을 ‘손으로 만든 것’으로 한정해야 하고 품질 기준을 시행령에서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근거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창덕궁 등 4대 궁궐, 각종 건축물 문화재에서 사용되는 종이나 외교문서와 같은 국가 중요기록물 종이 등은 한지 사용을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고 했다. 품질 표준화와 사용 의무화는 소비 촉진을 통한 전통한지 육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전통한지 관련 부처 간 협업체계 구축에 관한 내용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화부를 중심으로 산림청의 주재료·부재료 연구, 국가기록원의 기록용 한지 연구, 문화재청의 지류문화재용 한지 연구가 상호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이들이 협력할 수 있는 협업체계에 관한 내용을 추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과장은 “전통한지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만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정책 당국이 지금까지의 한지정책을 살펴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논문이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과장은 2014년 국가기록원에 근무할 때 전통한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듬해 행정안전부의 ‘훈장증서 개선을 통한 전통한지 원형재현 사업’에 참여했고 국회 등에서 열린 여러 토론회에 패널로 참가하는 등 한지 진흥에 힘써 왔다. 2019년 12월에는 전통한지 재현에 매달려온 김호석 수묵화가, 한지산업지원센터 임현아 연구개발실장, 닥나무 연구 전문가인 국립수목원 정재민 박사 등과 함께 ‘한국의 전통한지-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한지는 한지가 아니다’(도서출판 선)란 단행본을 펴낸 바 있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