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추적 중인 ‘제2의 n번방’ 주범 ‘엘’(가칭)이 피해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최은아’라는 가명을 사용해 여자인 척하고, 피해자를 압박하기 위해 ‘가짜 박제방’을 조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31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5월 10대 A양은 자신을 최은아라고 소개한 여성으로부터 “텔레그램에서 당신의 사진을 유포하고 신상을 ‘박제’할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 급히 알려드려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온라인에서 박제란 특정인의 신상정보나 성착취물 등을 공개한 뒤 지우지 않고 남겨둔다는 의미다.
A양은 SNS에 재미 삼아 자신의 모습을 촬영해 올린 후 이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영문도 모른 채 ‘신상이 유포됐다’는 말에 겁을 먹은 피해자가 “유포하지 말아달라”며 애원하자 그는 “도와주기 위해 연락한 건데 내가 영상을 왜 유포하냐”며 도리어 피해자를 타박했다.
그를 신뢰하게 된 A양이 박제방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 묻자 대화 캡처본 한 장을 발송했다. 캡처본에는 대화방에 참여한 3명이 ‘(A양) 신상도 같이 박제할 거임?’ ‘저X 친구들한테도 (사진) 다 보낼 거야’ ‘박제하려고 하는데 애들 좀 모아줄래?’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문자를 보낸 최은아는 엘 본인이고, 해당 캡처본은 그가 조작한 대화방인 것으로 보고 있다. 모니터링 결과 해당 시점에 A양의 신상정보 등이 유출된 정황은 없었다고 한다. 엘이 A양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성으로 위장해 접근한 뒤 ‘가짜 박제방’을 만들어 속였다는 것이다.
이후 A양은 엘의 말을 믿고 “범인을 잡으려면 대화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영상을 계속 보내 안심시켜야 한다” 식의 안내에 따라 성착취물을 스스로 촬영해 전송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n번방 사건’과 유사한 성착취 범죄를 벌인 엘을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수사 중이다. 확인된 피해자는 모두 미성년자로 총 6명이다. 확인된 피해 사진과 영상은 350개로 파악됐다. 경찰은 공범이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다.
엘이 주도한 성착취 방식은 피해자 몸에 ‘주인님’이라는 글씨를 새기도록 강요한다거나 텔레그램을 유통 경로로 삼는 등 범행 수법은 이전 n번방과 비슷하지만 제작과 유통 방식은 진화했다. 이전에는 주 무대로 활동하는 대화방이 있었지만 엘은 특정 대화방에 둥지를 틀지 않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범행 증거를 최소화 했다.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과 n번방을 운영한 문형욱이 구속될 무렵인 2020년 중순쯤 등장해 활동을 시작한 그는 “난 절대 잡히지 않는다”며 대범하게 범행을 이어갔다. 특히 앞서 n번방 사건을 쫓았던 ‘추적단 불꽃’을 사칭해 “신상이 유포됐는데 도와주겠다”며 피해자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그러던 엘이 돌연 자취를 감춘 것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A양에게 범행을 저지른 직후인 지난 5월쯤 대화방에 있던 관전자 한 명이 자신의 존재를 언론에 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겁을 먹고 활동을 멈췄다. A양은 엘의 마지막 피해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2020년 3월 국민일보와 함께 ‘n번방 추적기’ 시리즈를 보도한 ‘추적단 불꽃’의 원은지 미디어플랫폼 ‘alookso’(얼룩소) 에디터는 “앞서 n번방 사건의 주범들이 구속되고, 법 개정도 시작됐지만 ‘이 정도면 됐다’는 안일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다시 번지기 시작했다”며 “공범이 있을 가능성을 열어 놓고 신속한 수사를 통해 가해자를 엄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