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올린 1기 신도시 재정비…곳곳이 지뢰밭 [스토리텔링경제]

입력 2022-08-29 12:20 수정 2022-08-29 17:27
개발 순서나 용적률 등 주민 설득 부담
철거로 인한 전세난 장기화 우려
1기 신도시 특혜 논란도 부담 요인



일산, 분당 등 1기 신도시 재정비와 관련한 정부 움직임이 분주하다. 주민들로부터 ‘공약 파기’라는 반발이 확산할 조짐이 보이자 정부는 연구용역을 다음 달 발주하고 최대한 신속히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다음 달 8일 1기 신도시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성남·고양·안양·군포·부천시장)과 간담회를 여는 등 재정비를 위한 준비 작업을 착착 밟아가는 모양새다.

정부는 2024년 이내에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이는 과거 용산정비창(50개월), 3기 신도시 개발(36개월)에 비하면 확실히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1기 신도시 재정비는 과거 도시개발 프로젝트와는 완전히 양상이 다르다.

지금까지 신도시 개발이 대부분 국유지나 토지 수용을 통해 확보한 빈 땅에 집을 짓기만 하면 됐던 것과 달리, 1기 신도시 재정비는 집을 짓기에 앞서 개발 순서와 이주 대책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1기 신도시 재정비는 한국 도시개발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다. 다만 계획 수립 단계부터 실제 재정비까지 상당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어 성공 여부를 장담하기 어렵다.


재정비의 키를 쥔 MP, 주민 설득할 수 있을까

정부는 5개 신도시별로 전담팀을 만들고 ‘마스터플래너(MP)’를 지정해 도시 맞춤형으로 재정비 계획을 세운다는 방침이다. 도시계획 전문가인 MP는 신도시 재정비의 골격을 세우는 건 물론 주민과의 소통도 맡는 중책이다.

문제는 이 MP의 ‘영(令)’이 설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1기 신도시 내 아파트는 29만2000가구다. 29만 가구를 동시에 개발할 수는 없으므로 정비 순서를 정해야 하는데, 입주 시기가 1991~93년으로 비슷하다 보니 정비 순서를 두고 지역 간 합의가 원활하지 않을 수 있다.


같은 신도시 내에서도 단지별로 용적률이 다르다는 점이 골칫거리다. 용적률은 재건축의 사업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인 동시에 주거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분당 아파트(9만7600가구)의 평균 용적률은 184%이지만, 분당구 야탑동 매화마을 주공3, 4단지 용적률은 각각 101%, 133%에 불과하다. 반대로 같은 야탑동 매화마을 공무원2단지와 장미마을 현대아파트 용적률은 각각 200%, 214%나 된다. 단지별로 사업성이 다르다 보니 원하는 용적률과 개발 방식을 두고 이견이 불거질 수 있다.

정부는 1기 신도시 특별법을 통해 용적률을 법적 상한인 300%까지 허용하고 역세권 등 일부 지역은 종상향을 통해 최대 500%까지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그러나 용적률이 지나치게 높으면 인접 단지 등의 일조권 침해 등의 우려도 생길 수 있다. MP가 마련한 마스터플랜에 대해 신도시 내부 반발이 이어지면 개발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도시 재창조 필요하다? 의견 분분

정부는 1기 신도시 재정비를 위해 각종 기반시설과 광역교통 등을 포함해 ‘도시 재창조’ 수준으로 종합계획을 수립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도시 재창조 수준의 계획 수립이 필요한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29일 “1기 신도시 재정비를 거치면 현재 29만 가구에서 약 40만 가구로 인구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므로 도로나 학교,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부터 전부 새로 계획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원 장관은 “장관 직을 걸고 1기 신도시 재정비 일정을 최대한 당길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반면 고준석 제이에듀투자자문 대표는 “분당·일산 같은 곳은 자족 기능을 갖췄고 녹지나 각종 인프라도 충분히 갖춰져 있다”며 “정부가 도시 재창조 같은 거창한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시간을 끌기보다는 주민들이 알아서 재건축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거가 유발할 전세난, 지방 반발 우려도

철거 단계에서는 현재 1기 신도시에 사는 주민들의 이주 대책이 골치 아픈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비업계에서는 1기 신도시를 순차적으로 개발할 경우 철거에만 3년 안팎이 걸릴 것으로 본다. 문제는 29만 가구 이상 대규모 인원이 정비 기간 전·월세로 거주할 주택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하반기 옛 반포주공1단지(서울 서초구) 철거를 앞두고 약 4000가구가 이삿짐을 꾸리자 일대 전셋값이 들썩였던 게 좋은 참고 사례다. 한국부동산원 주간아파트가격동향조사에서 지난해 6월 둘째 주 서울 서초구 전셋값 상승률은 0.56%로 0.11%였던 서울시 전체 평균보다 5배가량 높았다. 인접한 동작구의 전셋값 상승률도 0.20%로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재건축이 시작돼 이주하더라도 주민 대부분이 자녀 학교나 생업 등으로 원래 살던 지역에서 멀리 떠나지 않기 때문에 재건축이 본격화하면 인근 전셋값이 급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초구와 동작구의 전셋값 상승률은 8월 둘째 주까지 두 달간 서울시 전체 평균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1기 신도시 가구 수가 반포주공 때의 73배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세난은 더 광범위하고 오래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2020년대 중반에 입주하는 3기 신도시를 배후단지로 활용한다는 구상이지만 이미 상당 물량이 사전청약으로 입주자가 예정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또 창릉(고양시)과 대장신도시(부천시)를 제외하면 대부분 1기 신도시와 거리가 떨어져 있어 활용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1기 신도시에 대한 특혜 논란도 부담 요인이다. 1기 신도시에 대한 용적률 특혜 부여 추진에 당장 서울에서부터 ‘서울에도 준공 40년이 지난 아파트가 수두룩한데 1기 신도시에만 특혜를 준다’는 날 선 반응이 나온다. 수도권 과밀화를 부추기고 지방 균형발전에 역행한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국토부는 이런 점을 의식해 1기 신도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대전 둔산지구나 광주 상무지구, 부산 좌동 등 지방거점 신도시도 재정비 관련 연구용역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