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한국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을 제외하면서 한·미 동맹 강화를 외쳤던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외교가에선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민간기업의 대대적인 투자 선물까지 받아간 미국이 한국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일정 요건을 갖춘 전기차에 한해 중고차는 최대 4000달러, 신차는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를 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액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선 북미에서 차량을 조립해야 할 뿐 아니라, 내년 1월부터는 일정 비율 이상 미국 등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핵심 광물을 사용해야 하는 등 추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때문에 현재 전량 한국에서 생산되는 현대 아이오닉5와 기아 EV6의 미국 현지 가격 경쟁력이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우리 정부는 법안에 담긴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뿐 아니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 위반 소지가 있다는 우려를 여러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 측에 전달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지난 19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 직접 이런 의사를 피력하는 등 외교당국 최고 책임자까지 나선 상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장 상황이 바뀌긴 쉽지 않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미국 입장에선 한국 등 특정국가를 예외로 두기 시작하면 다른 나라의 반발이 이어진다는 부담이 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침체로 지지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한·미 동맹보다는 경기부양을 우선순위에 둘 것이란 관측도 있다.
해당 법안이 외국산 차에 사실상 관세 부과 효과를 내면서 미국 자동차 업계에 힘을 실어주려는 소위 ‘내수용 법안’이라는 해석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는다.
WTO 규범을 통해 미국 압박하는 방안도 있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WTO 자체가 유명무실한 데다 무역분쟁을 제소할 경우 재판에 최소 4~5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을 설득해 예외를 받아낼 수 있도록 정부가 전방위적인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22일 “미국에서도 이 법안이 자유무역에 위배된다며 ‘아메리칸 퍼스트’를 내걸었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반대 여론이 적지 않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런 반대 여론을 활용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인해 우리나라와 유사한 피해를 볼 수 있는 유럽연합(EU) 회원국들과 공동으로 대응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정부 관계자는 “이제 막 법안이 만들어진 만큼 향후 상황을 지켜보며 문제를 해결해나갈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