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문화적인 악기와 수평문화적인 악기, 어느 것이 예배에 적합한가[기고]

입력 2022-08-05 08:42 수정 2022-08-07 16:04

현용수
쉐마교육연구원 원장
전 서울교육대 교수

며칠 전 국민일보에 ‘악기 없이 예배 드린다고? 부활하는 아카펠라 찬송’이란 기사가 실렸다(국민일보 2022년 7월 23일자 7면 보도). 논지는 예배 시간에 무분별한 악기 사용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적극 동감한다. 그 이유를 인성교육학적 입장에서 설명해보자. 음악에도 수직문화적인 소리와 악기가 있고, 수평문화적인 소리와 악기가 있다.

무분별한 악기는 후자를 말한다. 인성교육학적 입장에서 수직문화는 전통, 역사, 철학, 사상, 고전, 효, 애국심(충) 및 고난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를 살찌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다.

이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외면적 수평문화와 대조된다. 수평문화는 물질, 권력, 명예, 유행, IQ교육 등으로 이루어진다.

전자가 정신세계를 살찌우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문화라면, 후자는 인생의 본능적 재미(쾌락)를 찾는 문화다. 전자가 지혜라면 후자는 지식(IQ)이다.

전자가 변하지 않는 정신적 형이상학적 가치들이라면, 후자는 시대마다 자주 변하는 세속의 형이하학적 가치들이다.

전자는 깊이 있는 심연문화 혹은 뿌리문화이지만, 후자는 얕은 표면문화다.

따라서 전자는 고전을 좋아하지만 후자는 자극적이고 퇴폐적인 영상문화를 좋아한다.

인성교육학적 측면에서 전자가 내면적으로 ‘깊은 생각’을 하고 외면적으로 ‘바른 행동’을 한다면, 후자는 ‘얕은 생각’을 갖고 ‘제멋대로 행동’을 하기 쉽다.

음악의 장르에도 수직문화적인 사람은 고전적인 클래식을 선호하지만 수평문화적인 사람은 랩이나 락과 같은 빠른 비트의 음악들을 선호한다.

전자가 인생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는 음악이라면 후자는 주로 육(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짧고 반복적인 높은 음들로 이뤄진 곡들이 대다수다.

악기를 예를 들면 파이프 오르간은 수직문화적 연주에만 쓰이는 악기이기에 수직문화가 강한 교회예배에는 어울리지만 수평문화가 강한 나이트클럽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어떤 악기들은 대개 육을 흥분시키는 수평문화적 연주 방식에 많이 동원된다.

이런 연주 방식은 나이트클럽에는 어울리지만 교회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주일 대예배에는 이런 악기들을 금하고 찬양선곡도 복음송보다는 클래식 찬송가를 권하고 싶다.

일단 교회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종교심리학적 입장에서 수직문화가 가장 강한 종교 시설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곳이지, 재미를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

천주교 성당이나 불교의 사찰에 재미를 보러 가는가. 아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으러 간다. 재미를 보려면 시끄러운 나이트클럽에 가야 한다.

물론 혹자는 교회는 기쁨을 주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 살았던 에덴의 기쁨이다.

‘에덴’이란 단어는 ‘delight’(기쁨)란 뜻이다. 에덴을 교회의 첫 번째 모형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육의 쾌락으로부터 얻는 즐거움(pleasure)과 다르다. 전자는 위로부터 오는 영혼의 샘솟는 거룩한(聖) 기쁨이고, 후자는 육을 자극해 얻는 세상의 속(俗)의 즐거움이다.

천주교나 불교는 수천 년 동안 수직문화적 음악을 고수하는데 왜 개신교만 그렇게 시끄러운 음을 사용하는가. 그들 주장은 그래야 교회가 재미가 있어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그렇지가 않다. 2006년 5월 25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한국 3대 종교 중 불교를 믿는 인구는 3.9%, 천주교는 74.4% 증가한 반면, 개신교는 1.6% 감소했다.

왜 개신교 인구는 줄고, 천주교와 불교 인구는 늘었을까. 특히 왜 개신교 인구는 1.6% 줄었는데 천주교 인구는 74.4%나 크게 늘었을까.

2006년 10월 30일 개신교계 목회사회학연구소(소장 조성돈 교수)는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 성장’ 주제의 포럼을 갖고, 개신교인이 천주교로 간 이유를 발표했다.

이들을 성당으로 이끈 가장 큰 힘은 ‘천주교는 성(聖)스럽다’는 인상을 주지만 개신교는 ‘화려하고 활기차지만, 시끄럽고 가벼운’ 교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했다(한국일보, 나는 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갔나, 2006.11.23).

그들은 경박하게 보이는 개신교 문화에 질린 것이다. 반면, 성당에서는 엄숙해서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감동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개신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천주교로 옮긴 것이다.

개신교는 왜 천주교처럼 성스러운 인상을 주지 못하고, 가벼운 인상을 주나. 그동안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해 경쟁적으로 수평문화적 재미 위주의 가벼운 프로그램을 많이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 결과 교인들의 영적 수준만 더 떨어뜨렸다. 반면 천주교나 불교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수직문화적 엄숙한 분위기를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 성공의 비결이다.

물론 강한 수평문화에 물든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선호하는 수직문화적 음악을 싫어하기 쉽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부모세대의 신앙을 전수받기 위하여 수직문화적 음악에 더 익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반대로 가고 있다.

교회마저 수평문화적 악기를 선호한다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러니 교회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다. 신앙의 강도가 약해지고 있다.

코로나의 위기에 1만여 교회가 사라졌다. 정통파 유대인은 아브라함 때부터 현재까지 4000년 동안 세대차이 없이 강한 수직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에 유대교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참고로 정통파 유대인 회당에서는 무악기 예배를 드린다.

그런 면에서 이제라도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두란노의 ‘찬양과 경배’ 중심의 열린예배 형식을 지양하고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처럼 ‘말씀과 기도’ 중심의 전통예배 형식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 회복 운동이다. 그래야 한국의 초대교회처럼 하나님의 거룩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