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에 오래전 썼을 법한 ‘노예’라는 단어는 익숙하지 않다. 노예 얘기를 하면서 지속가능경영(ESG)까지 나오니 뜬금없기까지 하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가 있는 국제 기독NGO 국제정의선교회(IJM) 크리스타 헤이든 샤프 아시아‧태평양 지역대표도 ‘노예’라는 말의 낯섦을 인정했다. IJM은 인신매매와 성매매, 폭력에 시달리며 노예 같은 삶을 사는 극빈층을 돕고 있다.
30일 유엔이 정한 세계 인신매매 반대의 날을 앞두고 샤프 대표에게 현대 노예에 대한 정의와 한국교회가 해야 할 역할을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진행했다. 샤프 대표는 코로나 직전인 2019년 한국IJM이 설립된 이후 처음 방한했다.
샤프 대표는 “ESG의 S(사회)와 더불어 최근 전 세계가 강제노동 인신매매 등 노예문제를 해소하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그 노력에 한국교회가 함께 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SG에 노예가 나온 이유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땄다. 기업 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 등 투명 경영을 고려해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그 동안 기업들은 환경인 E에 관심과 투자를 집중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공급망의 회복 탄력성과 함께 투명성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S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질 것이라 봤다. 각국 정부와 소비자, 투자자들이 기업의 노동착취 같은 비윤리적 활동을 견제한다는 뜻이다.
이미 국가들은 노예로 설명되는 기업 현장에서의 인권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미국에선 ‘위구르 강제노동방지법(UFLPA)’이 발효됐다. 강제노동에 대한 규제 강화를 목적으로 제정된 이 법은 신장 위구르자치구에서 채굴 생산 또는 제조된 제품은 물론 지역과 관계없이 신장 위구르와 연계된 단체 또는 기업이 생산한 모든 제품의 수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국가 간 공조에도 나섰다. 지난해 6월 세계 주요 7개국이 정상회의를 마치고 내놓은 공동성명은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국가에 투자하는 기업이 현장 실사를 하지 않는다면 업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국제 사회로부터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엔 미국 주도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17개 국가가 포럼을 열고 향후 탄력적인 공급망 구축을 위해 머리를 맞댄 자리에서 강제노동 근절 등을 합의하기도 했다. 이 포럼은 지난해 10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개최한 G20 기간 공급망 정상회의 후속이다.
문제는 노동착취 등에 대한 한국과 한국기업의 인식이다.
미 국무부는 매년 나라별 인신매매 대책 보고서를 발표하는데 지난 20일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20년 만에 인신매매 방지등급이 1등급에서 2등급으로 강등됐다.
호주 인권단체인 워크프리재단이 발표한 2018 세계노예지수에서도 한국은 강제노동으로 생산될 위험 있는 물건의 서비스 조달에 무감한 12개국 중 하나였다.
한국IJM 민준호 대표는 “IJM는 1997년 설립 이후 전 세계 노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최근 세계적 관심사가 높아지고 있다. 노예가 낯설 수도 있지만 한국 사회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노예문제 해결에 한국교회 역할 필요
샤프 대표는 2017년 세계노동기구(ILO)의 보고서를 인용해 “노예로 살고 있는 숫자는 4030만명이다. 한국 인구의 약 80%”라며 현대 노예 상황부터 설명했다.
여기서 노예란 강제 노동, 인신매매, 성매매 등의 피해에 노출된 사람을 말한다.
워크프리재단이 발표한 2018 세계노예지수에선 대륙별 인구 1000명 당 노예 발생 비율이 아프리카가 7.6명으로 가장 많고 아시아‧태평양이 6.1명으로 그 뒤를 잇는다.
샤프 대표는 “아이들이 인도의 벽돌공장, 태국의 고기잡이배에 팔려가 돈도 받지 못한 채 15시간 이상 강제 노동한다”며 “글도 못 읽어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브로커 말만 듣고 따라갔다가 팔려간다”고 전했다. 이어 “과도한 노역도 문제이지만 브로커들은 취직시키는 데 돈을 썼다며 이들의 월급을 가져간다. 평생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라며 “더 큰 문제는 노예 부모의 자녀들도 교육을 받지 못해 노예 생활을 물려받는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실상은 IJM이 노예로 규정된 이들의 빈곤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서 나아가 국가 시스템을 바꾸려는 이유다. 구출, 재활 지원과 함께 법적 처벌, 사법 체계 강화에 집중하는 이유다.
샤프 대표는 “노동착취와 인신매매하는 가해자들은 자신을 처벌하지 않는 국가 시스템을 믿고 불법을 저지른다. 그들의 믿음은 놀라울 정도”라며 “IJM은 그 믿음에 균열이 가도록 한다”고 말했다.
노예 문제가 심각한 곳에 현장사무소를 세워 10년, 20년에 걸쳐 시스템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이후 지역사회가 노예 문제를 근절하도록 형사 사법 체계를 보강하고 법 집행력을 강화하도록 돕는다.
덕분에 IJM을 통해 지난해 노예 소유자로 의심되는 혐의자와 가해자 등 1816명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민 대표는 “A국의 경우 12세 미만 아이 30% 이상이 강제 노동했다. 노동으로 내몬 가해자들을 기소하고 법적 처벌했더니 0%대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IJM은 이 같은 활동에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가 함께해 달라고 요청했다. 샤프 대표가 방한 기간 한국교회 목회자와 기독교인 변호사를 만난 이유다.
샤프 대표는 “한국은 도움을 받은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됐고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이라며 “지금도 개발도상국에 가면 이름도 빛도 없이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을 만난다. 노예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국교회가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팀 켈러 목사 등은 기독교인으로서 노예문제를 눈 감을 수 없다는 말씀을 전하며 성도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말한다”며 “한국교회 목회자들도 노예문제 해결을 위해 기독교인은 물론 한국사회에 목소리를 내 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