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망쳤어요. 2학기에 올인 안 하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에요.” “방학 때 영혼까지 갈아 넣어야죠. 3등급인데 2등급 위로 못 끌어올리면 ‘인 서울(서울소재 대학 입학)’ 답 없어요.”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26일 정오에 찾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거리에선 오전 일찍부터 여름방학 특강을 마치고 분주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 이동하는 중·고교생들의 푸념이 터져 나왔다.
지난해 5월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 청소년들의 심리 건강 상태는 충격적이다. 우리나라 중·고교생 4명 중 1명(25.2%)은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의 우울감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감은 단순히 감정적 우울이 아니라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끼는 경우를 의미한다. 여학생(30.7%)이 남학생(20.1%)보다 우울감 경험률이 높았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우울감을 겪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13∼18세 중·고교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공부였다. 응답자 2명 중 1명 가량(46.5%)이 고민의 1순위로 ‘공부(성적)’를 꼽았다. 외모(12.5%) 직업(12.2%)이 뒤를 이었다. 박희진(가명·17)양은 “지난해 여름 3학년 선배 한 명이 성적이 떨어진 것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며 “솔직히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1개월 넘게 후유증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자살은 2011년부터 9년 연속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달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첫해인 2020년 들어 대부분의 연령층에서 자살률이 소폭 감소했지만 청소년층(9~24세) 자살률은 크게 늘었다. 2020년 자살로 사망한 청소년은 957명. 전년 대비 81명(9.2%) 증가한 수치다. 2016년(744명)과 비교하면 자살로 생명을 잃는 청소년이 하루 2명 수준이었던 것에서 3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암담하고 무거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지만 생명을 대하는 청소년들의 인식은 가볍기만 하다. 한은지(가명·17)양은 “중2 때 인근 학교에서 또래 학생이 자살했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저 쉬쉬하고 공부에나 집중하자는 분위기 때문에 ‘별 일 아니구나’하고 넘어 갔다”고 회상했다. 오현서(가명·18)양은 “중3 시절 옆 반 학생이 낙태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대부분 ‘운이 없었네’ 정도로 치부하는 걸 보고 놀랐다”며 “아무래도 드라마나 웹툰, 웹소설에서 청소년 임신을 묘사하는 방식이 영향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사거리 한 편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청소년들에게 음료수와 부채를 나눠주며 캠페인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거리에는 ‘소중함은 성적순이 아니에요’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프로라이프 비영리단체 아름다운 피켓(대표 서윤화)이 여름방학을 맞아 청소년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생명존중 캠페인’을 진행한 것이다.
서윤화 대표는 “통계상으론 고민의 1순위가 공부와 성적이지만 본질은 공감 부재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녀의 지적 성취도에 따라 적절한 격려와 위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떤 성적을 거두든지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소년들이 정보와 지식의 습득에 매몰돼 가치 분별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교회 내 주일학교 중·고등부에서 청소년들이 성경을 바탕으로 세상과 사회를 바라볼 수 있도록 현실과 접목된 설교, 부모 교육 등에 더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리에 마련된 부스에선 태아의 실물 모형을 활용한 프로라이프(생명존중) 캠페인, 미래의 태아 이름 지어주기, 올바른 성 가치관 확립을 위한 설문 조사 등이 진행됐다. 유심히 설명을 듣던 김예진(23)씨는 “그동안 직간접 경험이 없어서 낙태 문제가 피부로 와닿지 않았는데 실제 크기의 태아 모형을 만져보고 설명을 들으면서 지켜야 할 생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전했다.
거리 인터뷰에 응한 청소년들에게 부모님께 듣고 싶은 말을 물었다. “4등급이어도 괜찮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 “네가 진짜 행복했으면 좋겠다” 등 진심어린 응원을 요청했다. “성적보다 네가 더 소중해!” 부스 앞에 모인 캠페인 봉사자들의 외침이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는 청소년들의 책가방 무게를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