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가 복합위기에 빠져들면서 거대 기업들이 앞다퉈 지갑을 닫고 있다. 예정했던 투자를 미루고 채용을 보류하고 나섰다. 잇따라 긴축 경영에 돌입하는 것이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9일 이사회를 열고 청주공장 증설 안건을 의결하려 했지만, 논의 끝에 결정을 보류했다. SK하이닉스는 충북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43만3000여㎡ 부지에 신규 반도체 공장(M17)을 증설할 계획이었다. 투자 규모는 4조원 이상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는 예측을 바탕으로 미리 생산능력을 확보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가 불어닥치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에 투자계획의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 “공장 증설 일정 등은 결정된 바 없다”는 게 SK하이닉스 입장이다.
앞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3일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예고된 투자를 안 할 계획은 없다. 하지만 국제원자재 가격 등이 변화하는 상황이라 투자가 지연될 수 있다”고 언급했었다. 시장 상황을 고려해 단기적인 투자계획 조정은 있을 것이란 의미다.
기업의 투자 위축은 한국 기업만의 일이 아니다. TSMC, 마이크론 등도 투자 속도를 줄이고 있다. 소비심리가 빠르게 냉각하면서 반도체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 때문이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같은 주요 고객업체에서 주문을 취소하면서 그동안 100%를 유지했던 TSMC의 가동률은 90~95% 수준으로 낮아질 전망이다. TSMC는 시설 투자계획을 기존 400억~44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로 낮춰 잡았다. 마이크론도 지난달 말에 있은 실적 발표에서 “신규 공장·설비 투자를 줄여 공급과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격적으로 ‘배터리 영토’를 확대하던 LG에너지솔루션도 브레이크를 밟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1조7000억원을 투자해 미국에 지으려던 자체 배터리 공장 투자계획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GM, 스텔란티스 등과의 합작공장 투자는 그대로 진행하되 자체 공장 건설은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빅테크들은 긴축경영에 돌입했다. 블룸버그는 애플이 내년에 일부 사업부문의 인력 채용을 축소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통상 애플은 해마다 5~10%가량 인원을 늘려왔지만, 내년에는 일부 부서의 인원을 확대하지 않기로 했다. 퇴사자가 나와도 충원하지 않을 방침이다. 단, 회사 전체가 아닌 일부 부서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내년에 증강현실(AR) 헤드셋을 출시하는 등 공격적인 신제품 출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번 채용 감축은 꼭 필요한 인력만 더하겠다는 취지다. 시장에서는 불필요한 ‘군살’을 뺀다는 뜻으로 읽는다.
구글도 채용 속도를 늦추고 나섰다. 순다 피차이 최고경영자(CEO)는 직원들에게 “올해 남은 기간 동안 채용 속도를 늦출 것”이라고 공지했다. 아마존,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 스냅 등도 지출·채용 축소 방침을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테슬라는 감원을 하고 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