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성적 수치심과 성적 불쾌감

입력 2022-07-10 20:07

지난해 연말의 일이라고 했다.

어느 공기업 과장이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상태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부서 회식 자리에 참석한 부하 직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마디 했다. “오, 야한데! 오늘 애인이랑 데이트 하나봐.” 이 한마디로 그는 정직 1개월의 징계처분을 받았는데, 이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정말 예뻐 보여서 예쁘다는 의미로 위아래를 본 것이고 예뻐 보인다는 의미로 한마디 했을 뿐인데, 이게 부하 직원이 성적 수치심을 느낄만한 일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적 욕망’에는 성행위나 성관계를 직접적인 목적이나 전제로 하는 욕망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성적으로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등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줌으로써’ 자신의 심리적 만족을 얻고자 하는 욕망도 포함된다.”

대법원 판례 중 한 대목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수치’를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이라고, ‘성적 수치심’을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나 남성·여성의 육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수치를 느끼는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위 판례처럼 그간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를 당한 사실에 대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마음을 ‘성적 수치심’이라고 규정하고, 법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용어를 관습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피해자가 스스로 원해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도 아닌데, 왜 피해자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가. 오히려 가해자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므로 ‘성적 수치심’의 주체는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국여성민우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성적 수치심은 누가 느껴야 하는 감정일까’라는 질문에 99.01%의 응답자가 ‘가해자’가 느껴야 할 감정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해서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는 과거의 정조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고, 마치 성범죄의 피해자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어 적절하지 않다”고 밝히면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기성세대는 여성을 ‘피해자다울 때’ 지켜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단어 하나가 바뀌었다고 ‘부끄러움’을 강요·학습하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 인식과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바라보는 막연한 관념이 쉽게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편견과 불합리한 관념을 깨부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결정은 늦었지만, 매우 잘한 결정이다.

“과장님 자녀 있으시죠? 혹시 따님도 있나요?”

“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데, 왜요?”

“오늘 집에 가셔서 부하 직원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따님에게도 한 번 해보시고 따님이 어떻게 느끼는지 물어보세요.”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