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전 복부에 이상을 느껴 테이핑을 하고 출전한 나달은 첫 세트부터 이상징후를 드러냈다. 프리츠의 와이드앵글 서브를 연거푸 따라가지 않고 포기하면서 세트를 내줬다. 코트 좌우를 횡단하는 끈질긴 스트로크가 트레이드인 나달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2세트 초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3-3으로 따라잡힌 위기 상황, 불편한 기색에도 기어이 자신의 서브 게임을 따낸 나달은 곧바로 메디컬 타임아웃을 요청했다. 벤치에 있던 아버지 세바스찬이 나달을 향해 머리 위로 두 손을 교차하며 경기 속행을 만류하는 듯한 모습도 포착됐다. 다들 기권을 떠올렸지만 나달은 치료를 받고 코트로 돌아와 묵묵히 경기를 이어갔다.
서브 시속은 확연히 떨어졌고 가동 범위에 불편함이 눈에 띄었다. 전반적으로 샷에 온전히 힘을 싣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가 막힌 완급 조절과 끈질긴 라인 공략으로 오히려 프리츠를 압박했다. 특히 힘을 뺀 대신 T존과 와이드앵글을 넘나드는 핀 포인트 제구로 서브에서도 해결책을 찾았다. 경이로운 플레이로 2세트를 따내자 관중들의 경탄과 갈채가 쏟아졌다.
3세트를 내줬지만 4세트를 겨우 잡으며 균형을 맞춘 나달은 마지막까지 가공할 정신력을 보여줬다. 다리 쪽 부상이 있었던 프리츠도 체력에서 문제를 드러내면서 경기는 대등하게 흘러갔다. 서로 브레이크를 거듭, 매 게임 천당과 지옥을 오간 두 선수는 기어이 타이브레이크에 돌입했다. 엄청난 노련미와 집중력으로 박빙의 승부처에서 먼저 5-0 런을 달린 나달은 날카로운 패싱샷으로 프리츠를 연이어 주저 앉히며 기어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달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이 기권을 권했고 꽤 오래 고민했다. 커리어에서 몇 차례 기권해본 적은 있지만 나는 그게 싫다”며 “그래서 계속 싸웠고 결과에 상관없이 경기를 끝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복부가 좋지 않았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서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고통을 참는 데 익숙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다”면서 더 많은 검사를 받고 회복 방법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나달의 준결승 상대는 8강에서 크리스티안 가린(43위‧칠레)을 셧아웃시킨 ‘코트의 악동’ 닉 키리오스(40위·호주)다. 키리오스는 2014년 윔블던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나달을 꺾고 8강에 오르는 대이변으로 단숨에 혜성처럼 주목을 받았고, 2019년에는 2회전에서 만나 접전 끝에 나달이 이겼다. 강력한 서브와 네트 플레이가 강점인 키리오스는 부상을 달고 뛰는 나달에게 부담스러운 상대다.
키리오스를 넘어서야 노박 조코비치(세계랭킹 3위‧세르비아)와 대망의 ‘GOAT(역대 최고 선수)’ 매치를 펼칠 수 있다. 자신의 3번째 윔블던 제패와 더불어 통산 그랜드슬램 우승을 23회로 늘릴 기회를 맞은 나달로선 부상 회복 여부가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