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우수한 기록문화의 역사를 가진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편찬됐으며 고려·조선시대에는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를 기반으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이렇게 작성된 실록과 시정기는 춘추관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됐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이 대표적인 국가기록물로 꼽힌다.
600년 조선 왕실의 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은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에 기반해 작성됐다.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의 세 번에 걸친 검수와 교정을 거쳐 완성했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 「태종실록」 7권
실록에는 왕과 신하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부터 정치의 잘잘못까지 낱낱이 기록돼 있다. 따라서 왕이 승하한 후에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왕실과 관련된 사람은 일절 관여할 수 없었다.
사관들은 완성된 실록을 춘추관에 보관했다. 왕을 비롯한 그 누구도 실록을 볼 수 없었다. 실록의 자료로 사용된 사초는 유출을 막기 위해 시냇물에 씻어 글자를 없앴다. 이로써 조선왕조실록은 긴 세월 동안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날 마찬가지로 최고 통치자의 행적을 기록한 ‘대통령기록물’이 있다. 국가기록물의 한 종류로 대통령 직무수행에 관련된 기록물, 국가적 보존 가치가 있는 대통령 상징물 및 선물 등을 통칭한다. 대통령은 재임하는 동안 모든 자료를 스스로 선택하고 분류한다. 정보 보호 기간까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물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부터다. 기록관 설립 기금 마련을 위한 웹사이트가 운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만 제공됐던 탓에 기록물의 양이 적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1969년 총무처 소속으로 정부기록보존소를 설립해 대통령기록물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당대 최고 중요 기록인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기록이 모두 소각됐다. 이때 우리나라 대통령기록물을 포함한 국가기록물이 대거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대통령기록물의 암흑기가 지나고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기록물을 포함한 공공기록의 공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999년 대통령기록물 관리 사항이 구체적으로 규정되면서 대통령기록물의 범위 확대, 무단 폐기, 반출금지, 수집 보존 조항 등이 명시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대통령기록관을 최초로 개관하고 설립을 의무화했다.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통령기록물 관리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관리 체계가 정립됐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2020년 9월 22일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해 ‘월북 의도’를 언급한 경위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대통령기록물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피격 공무원 이대준 씨 유족은 사건의 경위가 기록돼 있을 대통령기록물을 확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초 폐기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무단 폐기됐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디지털 자료 분석용 특수차량까지 동원해 755만 건의 기록물을 분석하며 91일간의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법조계는 과거 대통령기록관 압수수색이 이뤄진 전례가 있고 국방부와 해양경찰청 입장이 2년 만에 뒤집힌 만큼 대통령기록물 확인 명분은 마련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3일 대통령기록관은 “보호기간을 따로 정한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거나 관할 고등법원의 영장이 제시된 경우에만 열람·사본 제작 및 자료 제출 등이 가능하다”며 대통령기록물 공개 청구에 불응했다.
기록관 측은 대통령기록관에 이관된 이후 아직 정리와 등록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라 해당 기록물이 열람이 가능한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덧붙였다.
대통령기록관이 관련 정보의 부존재 및 확인불가 사실을 밝히면서 수사 절차를 통한 확인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공무원 피격 사건 논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대통령기록물 공개가 가능할지 여부에 관심이 집중된다.
배규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