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반도체 인재 육성을 강조했고, 이에 교육부는 ‘반도체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후속대책 마련에 연일 분주하다.
반도체는 자율 주행 자동차, 로봇 등 미래 첨단산업의 핵심이자 국가의 전략적 안보 자산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만, 중국 등과 만만치 않은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메모리 반도체뿐만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까지 집중 육성해야 한다. 반도체 관련 산업의 인력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산업계에서는 매년 3000명 정도의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반도체 인재 육성의 시급성을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대학도 산업계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반도체 인재 육성의 책무가 있다.
그러나 반도체학과 신설은 인재 공급의 측면에서 중장기 대책이므로 현재의 대학 학사구조 내에서 즉각 실행할 수 있는 단기적인 대책과 함께 병행돼야 한다. 대학에 학과를 신설하고 인재를 배출하기까지는 최소 5~7년이 소요된다. 새로운 학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 대학의 비전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학내 구성원의 의견 수렴과 합의가 필요한데, 이는 대단히 어려운 과정일 뿐만 아니라 이를 무시할 경우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특히 반도체학과를 새로 만들기 위해 대학의 정원을 늘리는 문제는 학령인구 급감이라는 현실과 상충되는 정책이다.
국가 대계를 위한 교육 정책을 제대로 수립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와 현장의 의견을 수렴해 보다 치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반도체 산업은 설계, 소자, 조립, 장비 제조, 재료생산 등 여러 산업분야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전자·화학·기계·환경·컴퓨터공학 등 다양한 전공의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또한 어떤 분야에서 얼마나 인력이 부족한지, 산업체에서 필요한 인력은 석·박사급이 아닌 학사급으로 충분한 것인지 등 반도체 산업의 인력 수요에 따른 맞춤형 인력양성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첫째, 학부의 경우 중장기적으로 반도체학과 신설을 추진하되, 단기적으로 부·복수전공으로 운영하는 ‘반도체 융합전공’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이미 교육부가 2017년 ‘학사제도 유연화 정책’을 통해, 첨단분야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입학정원을 두지 않아도 되는 학과(전공)의 설치를 허용한 바 있다. 대학에서는 입학정원 없이 부·복수전공으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학내 융합전공뿐만 아니라 타 대학과의 공동과정을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다. 학내 다양한 전공의 교수는 물론 관련 산업계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산업체 맞춤형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유용하다.
강원대학교에서는 입학정원이 없고 개별학과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미래융합가상학과’라고 명명하고, 2018년부터 ‘데이터 사이언스 학과’ 등 20여개 학과를 5년째 운영하고 있다. 기존 전공분야의 학생들이 다양한 미래 첨단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교육시스템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 디지털혁신 공유대학의 일환으로 ‘차세대반도체학과’를 신설해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에게 부·복수전공을 제공하고 있는 중이다.
둘째, 우리나라가 시스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석·박사 고급 인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타켓형 융합대학원’ 설치를 제안한다. 이미 BK21 대학원혁신지원사업을 통해 첨단분야 대학원 융합학과의 설치 및 운영의 체계가 활성화돼 있다. 학과별로 입학정원이 지정돼 있는 학부와 달리 대학원은 전체 정원 내에서 학과별로 자율적 조정이 가능하다. 최근 교육부는 학부 정원을 대학원 정원과 1대1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혁신적인 다양한 규제 완화를 시도하고 있다. 반도체 융합대학원의 신설 및 정원 확대와 연구비 확충을 통한 연구 여건도 개선돼야 할 것이다.
현재 수도권 대학을 중심으로 7개 대학만이 대기업과 ‘반도체 계약학과’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최근 거론되고 있는 반도체학과 신설은 지금 당장 인력 배출이 어렵기 때문에 국가 중장기 정책에 맞춰 설계돼야 한다. 지역균형발전과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 반도체학과의 신설은 반드시 지역 대학에 한해 허용돼야 한다. 또한 반도체 분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AI, 빅데이터, 디스플레이 등 21개 첨단산업 분야 전체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지역대학에 신설된 첨단학과는 지역에 성장동력을 제공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지역 혁신과 지역발전, 더 나아가 국가 경쟁력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셋째,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분야 학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설계와 운영에 산업체의 요구와 참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학생들의 졸업 후 취업 보장과 현장 역량을 기르기 위한 실험실습 기자재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 시절에도 IBRD 지원금, 교육부의 실험실습기자재 확충비 등을 통해 대학이 최신의 실험 장비를 갖추고, 실험실습 교육뿐만 아니라 기업에 각종 실험과 기술을 제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 급성장에는 대학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반면, 대학의 실험실습 기자재 확충비는 지난 20년 동안 거의 증액되지 않은 반면 첨단 실험실습 기자재는 대학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고가이다. 현재 대학들은 반도체학과를 신설해도 가르칠 교수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첨단분야의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고가의 최신 기자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교육부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2015년 ‘대학회계법’, 2019년 ‘대학혁신 지원방안’ 등을 통해 대학의 혁신을 이끌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과도한 규제와 빈약한 재정지원으로 인해, 대학은 첨단산업의 전문인력 수요와 기술 발전의 속도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인재 양성도 대학의 경쟁력 강화와 얽혀 있는 문제다. 결국 대학에 대한 파격적인 규제 개혁과 더불어 전폭적인 재정 지원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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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영 강원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