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한국 연극 대표 작가 ‘타자기 치는 남자’ 차근호

입력 2022-06-22 09:34

한국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 차근호(50)는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어느 마술사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요즘 대학로에서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다. 천재적인 작가는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때로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인생의 결말을 비극적으로 맞는 경우도 있다. 중학교 때부터 차근호도 우울증을 겪었다. 이때 시작된 우울증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는데 19살이 되었을 때는 자살 충동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세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그는 생전 처음 점집에서 사주라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들은 말은 그를 더 절망하게 했다. ‘망망대해를 홀로 떠다니고 있으니 힘들고 외로우며 거기다 얼음에 갇힌 형국인데 아래에서는 얼음을 녹이려 불까지 때니 답답한 인생이라고’. 인생이 풀리려면 앞으로 20년 뒤 마흔쯤 되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신춘문예도 그때쯤 되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건 모르겠다고 했단다. 인생이 풀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차근호는 만 24살의 나이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으로 등단하게 된다.

그는 오기(傲氣)가 들었는지 마흔이 되자 다시 한번 사주를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마디로 스님 팔자인데 공부를 안 하면 거지 신세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마흔이 넘어 학위를 받고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를 받았다. 지금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운명이 궁금할 거예요.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어요. 우리가 흔히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존재에만 적용된다는 거죠. 욕망을 벗어난 존재에게는 운명도 사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왜냐하면 음양오행이라는 건 욕계에만 있는 거니까요.”
그가 사주를 어떻게 생각하든 마흔이 넘어야 인생이 풀린다는 말은 그가 달려온 인생을 보면 맞는 것 같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의 나이가 될 무렵 한국연극계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작품들은 영화와 방송 쪽에서도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조치원과 대학로를 오가며 글쓰기를 하고 있는 그는 약속한 시간 20여 분 전에 도착했다. 표정 변화를 찾기 힘든 그를 앞에 두고 대표적인 작품 <타자기 치는 남자>부터 이야기를 나눴다.


| <세기의 사나이>로 등장해 <타자기 치는 남자>가 된 차근호 작가

1980년대는 최루탄 연기로 가득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 10·26 사태가 불러온 ‘서울의 봄’은 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5·17 비상계엄조치에 의해 ‘죽음의 봄’으로 싸늘해졌다. 대학가(街)는 전투경찰이 상주해 있었고 위장 경찰도 강의를 들었다. 시위 진압용 가스 차와 경찰버스 ‘닭장차’가 한국 사회 도로를 점령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신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5·18 내란음모 사건 주범으로 조작한다. 이 ‘조작’ 사건으로 수많은 민주투사와 정치인들이 감옥으로 보내졌고 신군부의 ‘타자기 소리’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작과 은폐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 ‘타자기’ 치는 공안 경찰과 검사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좌공, 용공 세력들을 색출해냈고 좌·우 이념과 무관하게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70∼80년대를 뜨겁게 거친 세대들은 대통령으로 정치 거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인물들이 되었고 한국 사회의 타자기 소리는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고철로 퇴화해 갔다. ‘서울의 봄’을 거친 386세대 정치인 일부는 시대의 매서운 저항과 열사들의 죽음, 민주화 함성을 뒤로한 채 시대의 감성을 소환하며 정치 거물(巨物)이 되어 있다.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타자기 치는 남자>(차근호 작, 최원종 연출)는 2021년 초연을 거쳐 그해 대산문학상(희곡 부문)을 수상한 작품으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자행된 ‘삼청교육대’를 작품의 중요 소재로 삼고 있다.


― <타자기 치는 남자>는 희곡으로 읽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제자를 '삼청교육대'로 보낸 국어 교사 김문식과 뼛속까지 대공 경찰인 최경구를 소환해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80년대의 삼청교육대는 피해자들에게는 지워낼 수 없는 아픈 역사이자 우리 모두에게는 여전히 청산(淸算)되지 않은 역사이다. 작품이 매우 드라마적이다.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는 191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를 다루는 걸 목표로 했어요. 이번에는 1980년대 초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게 됐죠. ‘삼청교육대’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어요. 그만큼 ‘삼청교육대’는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준 존재니까요. 무엇보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간 건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죠. 실제로 인원을 충당하려고 학교에 공문까지 보냈으니까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많은 학생이 끌려갔습니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 ‘제자를 삼청교육대로 보낸 사람이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하게 됐어요. 국어 교사인 극중 인물 문식은 작가의 꿈이 있었던 80년대를 상징하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공문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제자 이름을 써내죠. 자신의 부주의로 제자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걸 알게 된 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식이 문제적인 건 자기 잘못을 알게 되고도 그 잘못을 바로잡을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문만 쓰죠. 그런데 이런 김문식이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최경구는 해병대 출신의 경찰인데 단순 무식하지만 자기를 애국자로 생각하는 인물이죠. 이런 인물이 김문식을 만나 글쓰기를 배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인물의 대립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 선생 문식을 통해서는 죄책감과 반성적 시대성이 좀 약하게 전달된다. 피해 학생 오형원을 상징할 수 있는 80년대의 아픔도 마찬가지다.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문식이 잘못을 만회하려 했다면 실천적인 행동과 움직임을 보였어야 해요. 삼청교육대에 찾아가 ‘제자가 여기 들어온 거는 자신의 실수다’라고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문식은 그렇게 하지 못하죠. 이 지점이 김문식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잘못을 직시할 것인가?’ ‘반성문을 쓰면서 회피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반성적 행동이 없었던 겁니다. 오형원이 보여준 것처럼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복수를 하는 사람은 드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로 봤을 때, 오형원은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할 것인가? 라는 딜레마에서 복수를 선택합니다. 형사 최경구의 딜레마는 지금까지 믿고 살아왔던 국가 이데올로기와 김문식과의 글쓰기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된 상식과 정의, 이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죠. 결국 최경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정의와 상식을 선택하게 되죠. 오형원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복수를 선택하지만 김문식의 선택은 애매모호하죠. 저는 김문식을 딜레마 앞에서 어느 한쪽에 서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에 갇혀버리는, 그 시대를 비출 수 있는 인물로 다루고 싶었어요. 어쩌면 세 인물 중에서 우리와 가장 비슷한 건 김문식이 아닐까 생각해요. 최경구가 모두가 꿈꾸는 슈퍼맨이나 초인(超人) 같은 이상적인 존재라면, 대다수는 김문식 처럼 살지 않을까요?”


― 요즘 작가와 연출은 공연을 위한 특수관계가 유연해진 것 같다. 작가의 의도나 극중 인물의 극적 갈등이 텍스트로 드러난 것보다 실제 공연에서 축약이 되거나 작가와 다르게 해석되어 진 공연을 본다면 어떤가?

“희곡이 연극화되면서 축약이 되는 건 연출가가 희곡의 문자 언어를 연극의 무대 언어로 표현할 때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인 것 같기도 해요. 물론 희곡을 단순히 공연을 위한 모티브 정도로만 생각하는 연출가라면 그 축약은 연출가의 횡포라고 볼 수 있겠죠. 최근에 최원종 연출가와 호흡을 맞추면서 무대에 올린 작품들은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해요. 최원종 연출은 이성적인 제 희곡을 감성적으로 무대에 풀었기 때문에 시너지가 생겼다고 하는데 이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런 합의점이 있기 때문에 공연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해도 연출의 관점과 해석을 존중하고 믿는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연출가가 제가 쓴 희곡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는 거에 대해 너그러웠던 건 아니에요.”

“예전에는 이런 것 때문에 연출가와 많이 싸우기도 했죠.(웃음) 2013년도 이후로 5∼6년간 연극을 안 했어요. 제가 쓴 희곡이 제 의도대로 완벽하게 연극화 되는 걸 꿈꾸었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걸 보고 절망을 했었거든요. 직접 연출도 해봤는데 결정적으로 저한테는 연출적인 재능이 없었어요. 그래서 더 절망했죠.(웃음) 내 의도대로 무대에서 표현되지 못한다면 대체 왜 희곡을 써야 하는가?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죠. 다행인 건 연극을 다시 시작하면서 극작가로서 연극을 어떻게 볼 것 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았어요. 답은 의외로 간단했죠. ‘희곡은 문자 언어로 쓰여진 1차 텍스트이고, 연극은 무대 언어로 만들어지는 2차 텍스트이다. 고로 희곡은 연극과 다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니까 극작가로서 해야 할 일도 알게 됐죠. 연극에 종속되는 대본이 아니라 공연을 전제로 하는 문학으로서의 희곡을 쓰는 것이 극작가가 하는 일이라고 마음을 굳혔어요.”


― 차근호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을 이야기할 때, 그는 다른 작가의 작품처럼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했다. 극중 인물들을 그의 입으로 말할 때 80년대 살아있는 실존 인물로 느껴졌다. 극중 인물 경구가 지식인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좀 부족하다는 얘기도 있고 ‘K’라는 존재가 드러나지는 않으면서도 시대를 포괄하는 매력적인 인물로 느껴진다.

“K라는 인물을 너무 드러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3인극인데 만약 K라는 인물이 너무 부각되면 작품의 전체적인 인물 구도가 깨질 것 같았거든요. 공연에서 인물 간의 관계나 변화 부분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하지만 텍스트에는 극중 인물의 관계나 변화 과정이 개연성 있게 구축되었다고 생각해요. 어느 평론가께서는 이 작품이 우화적 설정을 갖고 있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 말에 동감합니다. 단순 무식한 경구라는 인물이 2주 만에 문식이 추천한 책을 다 읽고 거기다 독후감까지 쓰는 건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실성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하나의 우화적 설정으로서 특별한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경구의 변화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이 부분은 경구와 ‘붕어’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공연에서는 최경구가 대학생 ‘붕어’에 대해 왜 그렇게 애착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지만 희곡에서는 최경구가 월남전에서 죽은 자기 동생과 ‘붕어’를 동일시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이 생략된 건 자칫 신파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 연출가의 우려 때문이었어요. 연출가는 이 부분이 신파적인 정보 전달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저는 인물의 변화에 필요한 핵심적인 동기(動機)라고 생각했죠. 이 부분에 대해서 연출하고 많은 얘기를 했는데 결국 연출한테 설득당했습니다.(웃음). 하지만 경구의 변화에 대해서는 재공연을 하게 되면 연출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 마지막에 ‘붕어’가 죽는 것으로 처리되고 경구는 소설로 공익적 고발을 하게 된다. 최경구의 극적인 반전의 설정으로 작품을 설계한 이유는.

“처음에는 이 작품을 2인극으로 쓰려고 했어요. 2인극으로 구상했을 때는 최경구라는 단순 무식한 형사가 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자기도 몰랐던 작가적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김문식은 자기도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진 경구를 질투하는 이야기였어요. 문학적 재능에 대한 아이러니를 말하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1983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너무 준엄하게 다가왔어요. 최경구가 문학적 재능을 깨닫는 아이러니보다는 작가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죠. 다시 작품을 구상하면서 최경구를 통해 작가로서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우리는 김문식, 최경구, 오형원 중 누구와 닮았는가? 우리는 최경구 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정의와 상식에 더 다가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이었죠. 최경구가 진실을 보게 되면서 그걸 소설 형식의 보고서로 쓰는 건 시대가 작가에게 던진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희곡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K’ 존재는 누구인가?

“누구는 작품을 보시고 80년대에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일 거라고 생각하고, 또 누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생각하기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이건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K’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우리와 같은 소시민일 수도 있으니까요.”

― 요즘 <어느 마술사의 이야기>, <세기의 사나이> 이후로, <깐느로 가는 길>, <메이드인 세운상가>, <패션의 신>, <타자기 치는 남자> 등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를 집중적으로 쓰더군요.

“예전에 KBS에서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누구나 아는 것처럼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해방이 되죠. 그런데 해방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많은 사람이 모르는 것 같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죠. 해방은 됐지만 여전히 일본군과 경찰은 남아 있었거든요. 해방 한 달 쯤 후에 미군들이 일본군을 무장을 해제하러 인천항에 들어와요. 많은 사람이 성조기를 흔들면서 미군을 맞이하죠. 그런데 경비를 서고 있던 일본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총을 쏴서 사람들이 죽었어요.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 경찰 총에 맞아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죠. 이때부터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작품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영화감독을 꿈꾸며 대학에 입학한 차근호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연극을 접하게 되면서 희곡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졸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희곡 창작을 시작한 그는 <천국에서의 5월>로 이듬해인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하지만 신춘문예 당선작 공연 이후 공연을 올리지 못하고 3년 간의 공백을 갖는다. 그러던 1999년 12월에 <조선제왕신위>가 실험극장(윤우영 연출)에서 공연되면서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 무대 미술상을 수상한다. 이로 <조선제왕신위>는 차근호를 각인(刻印) 시키게 되는 작품으로 남게 된다. 2000년도에 <암흑전설 영웅전>으로 삼성문학상을 수상하고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2002, 극단 작은신화, 최용훈 연출)에서 공연되면서 차근호는 차세대 극작가로 주목 받게 된다. 하지만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은 그다지 공연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2003년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면서 작가적 고민은 더 깊어져 간다.


그가 한국희곡작가협회 사무국장을 하던 시기에 저작권 문제는 극작가들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그는 이 문제를 희곡으로 옮긴다. 킬러 선생과 킬러 지망생을 중심인물로 하는 2인극 <살인교습>(극단 나모)은 저작권 문제를 풍자하는 작품으로 창작마을 단막극제에서 공연된다. 이 작품이 연출로는 첫 작품이다. 이후 이 작품을 3인극으로 발전시킨 <굿 킬>(2005, 김정훈 연출)로 ‘명작옥수수밭’의 창단 공연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은 <살인교습>과 소재에서는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한국 사회의 세대 간 문제와 남성우월주의를 풍자하는 작품으로 새롭게 창작된다. 이후 차근호는 <난 땅에서 난다>(2007, 명작옥수수밭)로 첫 장막극 연출을 했으며 <루시드 드림>(2010, 김광보 연출)으로 다시 한번 작가로서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돌연 <미스터 쉐프>(2013)를 마지막으로 희곡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다. 극작가로서의 삶과 희곡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후 극단 명작옥수수밭은 최원종 연출이 이끌게 된다.

이 무렵 차근호는 작가로서의 시간보다 학생으로서 시간을 보낸다. 고려대학교 대학원(문예창작과)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수업에 매진하기 위해 학교가 있는 조치원으로 이사를 한다. 이 시기 그는 불교, 철학, 역사를 파고든다. 2017년이 저물어 가던 늦은 가을 무렵, 차근호 인생에 반전의 기회가 온다. 최원종 대표가 미발표 희곡을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그는 <세기의 사나이>와 <어느 마술사 이야기>를 보냈고 이 작품들이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과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사업 작품으로 선정되면서 그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연극계에 복귀하게 된다. 연극계로 돌아온 차근호는 후배 작가였던 최원종을 연출가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작업은 차근호와 최원종을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와 연출로 만들었고 극단 명작옥수수밭 또한 창단 14년 만에 대학로를 대표하는 극단으로 만든다.

차근호 작가는 이 시기부터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두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역사적 상황이 던진 딜레마와 그 딜레마 앞에 선 소시민을 화두로 삼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의 작품들인 <깐느로 가는 길>, <타자기 치는 남자>, <패션의 신>, <메이드 인 세운상가>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관객과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이를 통해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안겨 준 <조선제왕신위> 이후 20여 년 만에 대학로를 탈환해 말 그대로 가장 잘나가는 핫한 작가가 된다. 하지만 차근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 <메이드 인 세운상가>를 끝으로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 시즌1을 끝내고 동시대의 딜레마를 다루는 작품들을 쓴다고 말한다. 이 작품들은 인간의 욕망, 자본, 권력, 환경 등의 다양한 소재를 다룰 예정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동시대로 시선을 옮긴 차근호의 작업들은 시즌2를 위한 탄탄한 토대가 될 것 같았다.


―차근호 작가의 리뷰를 읽어보니 대학 시절에는 영화감독이 꿈이었다고요.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꿈이 바뀌었죠. 서울예술대학 극작과에 들어가게 된 것도 직접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고 싶어서였어요. 면접 때도 “저는 영화감독이 되려고 왔습니다.”라고 했는데 교수님들께서는 별말씀이 없으셨어요.(웃음) 1학년 겨울 방학 때 과 동기랑 VHS 카메라를 사서 로드 무비를 찍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과에서 제일 무서운 선배님이 부르시더니 졸업 공연 때 스태프로 참여를 하라고 하셨죠.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하필 저랑 가장 친한 누나가 그 팀에 있었어요. 그 누나가 과 동기는 다른 팀 배우로 캐스팅됐다고 해서 별수 없이 연극 작업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저 보고 연극을 하라고 했던 누나는 폴란드에 가서 영화로 전공을 바꿨어요.(웃음) 연극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어요. 한 달 이상 같이 연습을 하니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사람은 겉 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죠. 그리고 일종의 동지애도 느끼게 됐고요. 91년 겨울에 있었던 졸업 공연에 참여하면서 희곡과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극작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중앙일보 신춘문예(1997, 천국에서의 5월)로 등단을 했다. 희곡에 대한 매력은.

“무엇보다 희곡은 무대의 배우를 통해 보여진다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시와 소설과는 다르게 작가가 마침표를 찍으면 연극으로 다시 시작된다는 게 매력이죠. 하지만 동시에 고통의 시작이기도 합니다.(웃음). 이건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건데 일기장에 이렇게 써놓았더라고요. 1987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동국대학교 연극과 졸업 공연을 보게 됐어요.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이었죠. 이 연극을 보고 엄청나게 감동한 것 같아요. 일기장에 ‘어쩌면 내 인생을 연극에 바칠지도 모르겠다’고 쓴 걸 보면요. 그러고 보면 전 연극과 인연이 깊은 것 같아요. 정말 그 예언대로 연극을 하고 있으니까요.”


― 2000년에는 역사극인 <조선제왕신위>(윤우영 연출 실험극장)으로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을 받고 하반기에는 게임을 소재로 한 <암흑전설 영웅전>(2000)으로 삼성문학상 장막희곡 부문에 당선되었다. <조선제왕신위>는 당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이 되었는데 인조와 소현세자를 다루던 기존 역사극과 분위기가 달랐고 신선하다고 느껴졌다.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관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저는 SF하고 판타지를 좋아해요. 등단하고 나서도 한때 이런 경향의 작품을 많이 썼었죠. 실험적인 작품도 쓰고요. 그런데 이런 작품들이 작가의 입장에서는 재미있지만 문제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그러니 공모를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었죠. 이때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어요. 대체 어떻게 하면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까? 그래서 쓴 작품이 <조선제왕신위>였어요. 인조와 소현세자를 다룬 작품인데 그때만 해도 소현세자는 대중한테 많이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어요. 인조반정이라는 정치적 문제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父子)의 갈등을 다루고 싶었어요. 제가 이 작품을 쓴 건 쓴 건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법과 소통의 방식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이 작품도 공모에서 떨어졌죠. 이때는 좀 우울했어요. 내가 시험하고 있는 방식이 맞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이 우연한 기회에 실험극장에서 공연하게 됐어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평이 좋았어요. 이 작품을 보고 동료 작가들이 많이 놀랐죠. 제가 역사극을 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했거든요. 근데 중요한 건 이 작품을 쓰면서 지금까지 고민했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었다는 거예요. 공감대와 소통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으니까요. 이 작품 이후로 제 관심사도 관념적인 주제에서 현실적인 주제로 바뀌었어요. 작품을 위해 관심사를 바꾼 건 아니었어요.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죠. <천국에서의 5월>은 관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어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성자(聖者)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저한테는 중요한 화두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화두가 자연스럽게 바뀌었죠.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지금까지도 저한테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조선제왕신위>는 ‘신’과 ‘인간’의 문제에서 인간과 인간의 문제,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작가의 시선이 전환된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곡으로 소통의 방식은.

“희곡으로 소통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희곡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탄탄한 드라마 구조를 지닌 작품을 쓰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인 드라마 구조를 올드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드라마는 ‘인간’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희곡 속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을 때 관객 또한 연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조선제왕신위> 이후로 저는 드라마 구조에 충실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해요. 저는 관객이 납득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는 이야기를 혼자서 일방적으로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관객들이 제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작가도 관객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한테 그 방식은 드라마 구조에 충실한 희곡입니다.”


― 초기 차근호 작가는 역사, 인간과 폭력, 삶을 다루다가 이후에는 근현대, 정치, 사회 분야로 소재를 넓혀가더군요. 작가로 한국 사회의 어떤 현상을 담아내고 싶은가.

“우리나라 현대사를 보고 있으면 정의와 상식이 부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해요. 특히 이건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아요. 청산하지 못한 이 부조한 세력은 지금도 잔존(殘存)하고 있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부조리한 세력이 여전히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를 잡고 이 사회의 시스템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딜레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 딜레마와 사회 구조, 시스템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던져진 부조리한 딜레마는 결국 지우지 못한 부조리한 역사에 기반하는 것이 아닐까? 딜레마는 왜 만들어지고 무슨 목적으로 던져지는 것일까? 동시대에 우리에게 던져지는 딜레마의 본질은 무엇일까? 성공하지 못한 개인의 삶은 그 개인의 문제일까, 아니면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작가적인 고민을 하게 됐죠.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얻은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건 있어요. 그건 한국 사회에는 해방 이후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고 우리에게 던져지는 딜레마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어도 본질적으로 이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거예요. 저는 앞으로도 이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과 딜레마의 관계를 탐구하고 희곡으로 쓰고 싶습니다.”


― 차근호 작가는 굉장히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고 하는데 신춘문예 당선 이후 누구에게는 한반도 받을 수 없는 삼성문학상과 많은 작품들이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고 줄곧 희곡작가로 걸어가고 있다. 작가의 아이디어와 글쓰기, 탈고 기간이 궁금하다.

“다른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저는 메모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구체적인 아이디어나 아니면 단편적인 생각, 인상적인 꿈, 책의 문장들, 인터넷에서 보게 된 여러 사건과 인물들을 메모하죠. 예전에는 수첩에 메모했는데 요즘은 네이버 메모를 많이 활용합니다. 그리고 일단 메모를 하고 나서 찬찬히 살펴봐요. 관심이 가는 내용들을 포스트잇에 써서 모니터나 벽에 붙여놔요. 집중해서 보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쓰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 문득 그 내용들이 연결돼서 하나의 이야기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아요. 예로 들면 <메이드 인 세운상가>는 1980년대 세운상가 사람들이 작정하면 미사일과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도시 전설하고 1986년 북한의 금강산댐이라는 두 개의 메모가 연결되어서 만들어진 작품이죠. 보통 하나의 메모보다는 두세 개의 메모가 연결될 때 좋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희곡 탈고 기간은 작품마다 다른 것 같아요. 보름 정도에 끝내는 작품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석 달 이상 쓰게 되는 작품도 있거든요. 평균적으로 보면 한 달 반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아요.”



| 대학로는 지금 차근호 작가, 최원종 연출 콤비로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전성시대’

안톤 체호프와 유진 오닐의 작품을 읽으며 희곡작가의 꿈을 키워온 작가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장막 데뷔작품인 <조선제왕신위>, <루시드 드림>, <타자기 치는 남자>를 꼽았다. 초기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쓰기 시작했다. 그는 전형적으로 쓰면서 생각하는 스타일의 작가였다. 초고는 최대한 빨리 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초고는 버리려고 쓴다는 말처럼 그도 초고를 토대로 수정작업을 진행했는데 보통 7~10번, 때로는 그 이상 작품을 수정했다. 2019년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글쓰기 방식도 바뀌었다. ‘쓰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쓰는 스타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스타일이 바뀐 것은 한류 열풍이 불던 중국에서 차근호 작가에게도 시나리오와 방송드라마 대본의뢰가 들어왔다. 시나리오와 방송드라마 대본을 쓰기 위해서는 3막 구조에 대한 공부가 필수였는데 이때 희곡 창작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희곡에서 시작된 3막 구조가 희곡보다 다른 장르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극작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능력이 된다면 3막 구조에 맞는 교과서적인 작품을 한번 써보고 싶어요. 제가 쓰는 작품도 완벽한 3막 구조를 갖고 있지는 않거든요. 구조적으로 교과서적인 작품이 있다면 후배 작가들이 굳이 외국 작품을 필사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이런 작품은 극 구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 재창단 이후 극단 <명작옥수수밭> 작품세계는. 연출과 차근호 작가의 공통점

“최원종 연출과 연극작업으로 만나게 됐을 때 가장 먼저 했던 고민은 우리의 공통분모를 찾는 거였어요. 원종이를 작가가 아니라 연출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이 중요했죠. 공통분모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어요. 원종이가 연출가로서 무대에 올린 작품은 ‘현대인에 대한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이었어요. <청춘, 간다>, <에어로빅 보이즈>, <헤비메탈 걸스> 등과 같은 작품들은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현대인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고 있었거든요. 최원종 연출하고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어요. ‘근현대 재조명 시리즈’가 다양한 시대와 상황 속에서 던져진 딜레마와 그 앞에선 소시민을 탐구하지만 최종적으로 이 탐구는 ‘나는 누구인가, 한국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귀결될 거라는 거였죠. 저하고 최원종 연출은 바로 이 이 지점을 공유하고 같이 연극작업을 하고 있어요.”


― 최원종 연출도 작가인데, 두 사람이 무대화 하면서 부딪치는 것은.

“제가 예상하지 못한 게 세 가지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후배 작가였던 원종이가 제 작품을 연출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였죠. 두 번째는 그렇게 제 작품을 잘 만들 줄은 몰랐어요. 마지막 세 번째는 원종이가 그렇게 악랄한 연출가인 줄 몰랐어요.(웃음). 제가 다시 연극을 하게 되면서 이 말을 했었어요. 극작가는 텍스트를 책임지는 사람이지 공연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공연은 전적으로 너의 영역이라는 말이기도 했죠. 선후배 작가였지만 지금은 작가와 연출로 만나 콤비가 된 건 극작가와 연출가로서 확실한 영역을 구분 지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사람이다 보니 원종이가 연출하는 걸 보고 화를 낼 때도 있긴 하죠. 그래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아요. 희곡과 연극은 다르다. 그러므로 극작가 또한 연출가의 해석과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원종이도 연출가로서 제 작품을 존중하고 최대한 희곡의 훼손 없이 무대화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부분이 서로를 믿고 가게 하는 것 같아요.”


―작가가 믿는 연출이라면, 최원종 연출의 장점이 있을 것 같다.

“최원종 연출이 저한테 이런 말을 했었어요. 형이 쓰고 싶은 작품은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라고요. 자기가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고요. 정말 이 약속을 지키더라고요. <메이드 인 세운상가>라는 작품에는 잠수함이 나오는 데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니까 “형, 좋아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도 있죠. 이러다가 극단이 파산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웃음). 제 작품을 기다려 주고 그걸 언제나 무대화시켜주는 연출가가 옆에 있다는 건 극작가로서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 정말 행복한 극작가죠. <타자기 치는 남자> 같은 경우도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 의도와 연출의 해석이 다른 부분이 있어요. 물론 이 부분은 작가로서 아쉽기도 해요. 하지만 이 작품을 다른 연출가가 만들었다면 지금처럼 좋은 공연이 될 수 있었을까? 저는 최원종 연출이 아니면 이 작품도 그렇게 주목 받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성적이고 자기는 감성적이라고 최원종 연출은 말하는데 정말 이런 상반된 성격이 작품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 작가로 데뷔 후 현재 30여 작품(희곡 24편, 뮤지컬 4편, 번안각색 5편, 총 33편)을 써왔다. 극단 명작옥수수밭을 통해 근현대 시리즈로 부각이 되었는데 시즌2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시즌2에서는 다양한 극형식으로 작품을 써보고 싶어요. 꼭 사실적이고 닫힌 무대에서만 드라마 구조를 구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시즌2에 앞서서 시작될 ‘동시대의 딜레마’ 시리즈에서 극형식에 대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고 해요. 소재적인 부분에서도 SF나 판타지, 알레고리적인 작품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동시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우리의 현실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인문학적 지식을 얻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아마 동시대 문제를 다루면서 축적된 에너지는 시즌2에서 강력하게 발산되지 않을까 해요. 저도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랍니다. 희망 사항이지만 시즌2에서도 여섯 작품을 발표해서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를 총 12편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차근호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무대로 소환되는 이미지들보다 드라마,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결되는 극적 구성과 장면들이 많았다. 기존 작품들도 영상으로 옮겨도 될 만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드라마와 시나리오가 잘 맡는 것 같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런 이야기는 최근에 많이 듣고 있어요.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의 작품을 보시고 영상 쪽에 계신 분들도 좋은 평을 많이 해주셨죠. 그런데 이 작품들이 의도치 않게 영상 쪽에서 좋은 평을 들은 건 역설적으로 연극 관객들에게 최대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어요. 지금의 관객들은 연극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상매체를 섭렵한 분들이죠. 이분들을 극장에 불러 모으려면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무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이분들이 ‘연극은 고리타분하다. 어렵다. 재미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더 신선하고 재미있고 독특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희곡만 고집했지만 지금은 방송드라마나 시나리오를 쓰는 것에도 열려 있어요. 기회가 되면 방송이나 시나리오도 쓰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희곡만이 극문학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돌이켜 보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고 부질없는 것인가 싶어요. 극작가가 치열하면 방송드라마 작가나 시나리오 작가는 그보다 더 치열하다는 걸 이제는 잘 압니다. 저도 더 치열하게 글을 쓰려고 해요. 극작가로 한가지 꿈이 있다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후배들이 필사(筆寫)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남기는 겁니다.


― 마지막 질문을 했다. ‘전업 희곡작가로 현실을 버텨내기 쉽지 않을 텐데’

“친한 작가 누나가 예전에 너는 작가 타이틀을 빼면 ‘도시 빈민’이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데 현실을 돌아보니 맞는 말이더라고요. 예전에 어떤 분들이 작가는 가난해 봐야 좋은 작품을 쓴다고 하신 적이 있었어요. 저는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어요.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씀하신 분 치고 가난한 분은 안 계시더라고요. 작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것도 작가가 깨야 할 벽인 것 같아요. 요즘 작가들은 먹고 싶은 거 먹고, 보고 싶은 책 사고, 떠나고 싶다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을 때 좋은 작품을 쓴다고 생각해요. 전업 극작가로 사는 건 분명히 힘듭니다. 하지만 저는 이 현실을 버티는 게 아니라 넘어가 보려고 해요. 벤츠를 타는 극작가.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차근호 작가의 작품 <조선제왕신위> 초연을 문화예술회관 대극장(현, 아르코 대극장)에서 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작가 이름은 잊고 연출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이 작품은 반청(反淸)을 국시로 삼고 삼전도의 치욕을 씻어내려는 인조와 광해군의 개혁정책을 수용해 국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현세자, 이들의 정치적 갈등과 부자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었다. 소극장 무대에서는 맨발로 무대를 걷고 뛰며 역동성을 생산해 내는 오태석 연극의 화력(火力)이 집중되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 차근호 나이는 27살이었고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 시리즈’로 다시 연극계로 돌아온 그는 한국연극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쉼 없이 달려온 그의 희곡은 단정하면서도 아이디어와 소재가 매력적이다. 차근호 작가만의 글쓰기 화력은 20년 이상 전진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대학원 수업에 제출할 과제를 마무리해야 한다며 빠르게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가 보내온 프로필에는 삼성문학상 장막희곡 부문 수상 <암흑전설 영웅전>, 한국희곡신인문학상 수상, 대산창작기금 희곡 부문 수혜 <조선제왕신위>, 대한민국 극작가상 수상, <타자기 치는 남자>로 대산문학상 희곡 부문을 수상했다고 적혀 있었다. 2010년 평민사에서 출판한 《차근호 희곡집1》을 시작으로 내년에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네 번째 희곡집에는 <세기의 사나이>, <어느 마술사의 이야기>, <타자기 치는 남자>, <깐느로 가는 길>이 수록된다고 한다.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극작가에게 첫 번째 출판은 공연입니다. 두 번째 출판이 말 그대로 책을 내는 거죠. 제 희곡집에는 공연된 작품만 수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한 권에 4~5편의 희곡이 실리니까 40편 이상의 희곡을 쓰면 희곡집도 9권 정도가 될 것 같아요. 9권의 희곡집을 내는 극작가가 한번 되고 싶어요.”

그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세기의 사나이>처럼 서울역으로 사라졌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