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우리 안의 낭떠러지

입력 2022-06-16 16:54 수정 2022-06-16 17:58
“틸리케의 비탈길”(Thielickestieg). 독일 함부르크 성 미카엘 교회를 향해 올라가는 작은 골목길이다. 아직 설교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 열정적인 설교자를 기념하는 지명이다. 사진=손성현 목사

“인간은 누구나 낭떠러지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지러울 수밖에……”

독일의 젊은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미완성 희곡 「보이체크」(1837)의 한 구절이다. 자기 안의 낭떠러지를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요란스럽다. 다른 목소리들과 다투며 자기 목소리를 관철하려 한다. 그것이 현실이며,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삶을 위한 정당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투쟁으로 한껏 달아오른 세상이, 아니 우리가 한사코 보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그것을 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찔한 공포와 충격으로 휘청거린다. 낭떠러지를 봤기 때문이다.

엘베 강에서 본 함부르크 전경. 성 미카엘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사진=손성현 목사

나치에 맞서 싸웠던 젊은 지성 헬무트 틸리케의 책 『신과 악마 사이』는 우리 안의 심연을 응시하는 눈빛이다. 혼돈의 어둠 속으로 버둥거리며 추락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 우리의 적나라한 실존을 파고드는 불빛이다. 이 책과 함께 자기 안의 낭떠러지를 직시하게 된 사람들에게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감지되는 손길이 있다. 추락하는 우리를 붙들어 주는 손이다. 호흡을 고르고 악의 정체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손이다. 광야에서 사십 일 밤낮을 버텨 낸 빈손, 교묘하고 압도적인 시험을 이겨 내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손이다. 그 손만이 광야의 시험에서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다. 오로지 그 손을 의지하여 광야로 들어갈 때 “나의 투쟁”(히틀러)의 광기와 폭력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그 투쟁과 맞서 싸운다는 미명 아래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1938년, 청년 틸리케는 나치 권력의 오만하고 거친 횡포에 절망했다. 그런 나치에 순순히 동조하는 대학과 교회를 보면서 더더욱 절망했다. 그럴수록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어떤 강압과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투사의 모습을 견지했다. 그러나 골방에서 마주한 그의 속사람은 비참할 정도로 휘청이고 있었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자기 자신의 실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그가 철저하게 새로 읽게 된 것이 예수의 광야 시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와의 치열한 씨름이 그를 새롭게 빚어냈다. 바로 거기서 그는 악마의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입으로는 전능의 하나님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이 늘어놓지만, 사실은 하나님마저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악마의 교묘한 전략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의 교회가 불의한 권력을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나선 정황이 훤히 드러났다. 어디 그뿐인가? 그런 교회를 격하게 비판하는 자기의 마음속에도 거대한 탐욕의 도성 바벨론이 자리하고 있다는 깨달음 앞에서 그는 전율했다. 자기 안에 있는 거대한 낭떠러지를 본 것이다. 그 낭떠러지는 악마의 압승이 예견된 자리처럼 보였다.

독일 함부르크의 성 미카엘 교회. 1955년부터 1985년까지 30년 동안 헬무트 틸리케는 이 교회에서 설교했다. 사진=손성현 목사

하지만 거기서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필이면 그 낭떠러지로 들어가신 것이다. 육신을 가진 모든 인간이 비틀거리며 떨어질 수밖에 없는 곳, 다시는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곳만 같은 그 자리가 예수와 만나는 자리가 되었다. 그 만남이 깊은 성찰 속에서 글로 빚어졌다. 그리고 그 글이 틸리케를 새롭게 빚어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신과 악마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는 자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청년 틸리케는 이렇게 선언했다. “인간은 한쪽의 칼이거나 다른 쪽의 칼이다. 한쪽의 눈동자거나 다른 쪽의 눈동자다.” 이 책을 쓰고 얼마 후 나치의 정책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교 교수직을 잃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게슈타포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다. 몇 년 후 연합군의 폭격이 그의 연구와 설교의 공간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다.

성 미카엘 교회 내부와 설교단. 사진=손성현 목사

그러나 그는 비록 흔들리면서도 언제나 한쪽의 칼, 한쪽의 눈동자로 살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우뚝 서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헬무트 틸리케는 탁월한 학자로서 전후 독일의 신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한편, “스펄전 이후 최고의 설교자”로서 사람들의 무너진 내면에 영적인 중심을 수축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1955년부터 1985년까지 30년 동안 틸리케는 함부르크의 성 미카엘 교회에서 설교했다. 엘베 강가에 세워진 유서 깊은 그 교회는 지금도 함부르크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틸리케가 설교를 하는 날이면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성 미카엘 교회를 찾았다. 설교 한 시간 전에 모든 자리가 꽉 차 있었다.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가장 비천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틸리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해변에서 성 미카엘 교회를 향해 올라가는 작은 골목길이 있는데 거기에 “틸리케의 비탈길”(Thielickestieg)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아직 설교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 열정적인 설교자를 기념하는 지명이다. 흥미롭게도 그 교회 정문에는 대천사 미카엘이 긴 창을 들고 악마를 완전히 제압하는 모습을 구현한 동상이 서 있다. “신과 악마 사이”의 치열한 싸움을 응시하며 살아온 틸리케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다.

성 미카엘 교회의 정문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 동상. 긴 창을 들고 악마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손성현 목사

우리는 모두 낭떠러지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아찔한 현기증을 이겨 낼 힘을 전해 준다. 틸리케는 그것을 확신하며 “광야에서, 그분과 함께” 보내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손성현 목사(『신과 악마 사이』 옮긴이, 창천교회 청년부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