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우유, 요구~릇트, 오이 50개 1만~5000원.”
지난 9일 인천 옹진군 승봉도에 앰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물트럭을 모는 권병도(66)씨가 섬에 도착해 녹음한 이번 주의 신상품 목록이다. 권씨는 한 주씩 번갈아 가며 승봉도와 대이작도, 자월도와 소야도를 각각 2박3일 일정으로 방문해 섬마을 주민들에게 각종 채소, 식료품, 잡화 등을 판매한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트럭 만물상 동석(이병헌)이 다른 상인에게 물건을 산 주민들에게 화내는 장면이, 권씨가 한 다큐에서 보였던 모습과 흡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면적 2.22㎢의 작은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트럭이 어느 집 앞에 멈춰 서자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취나물, 매실, 설탕, 두부 등 몇 주는 거뜬히 먹을 식료품을 가리켰다. “배가 하루 한 번밖에 안 댕겨서 이 장사(권씨) 아니면 우린 살도 못 해”라며 바지춤에서 10만원이 넘는 돈을 꺼내 건넸다. 필요한 물품들을 문 앞에 놓고 가는 권씨의 트럭은 주민들에겐 섬마을 로켓배송이나 다름없다. 권씨는 거래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주민들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마을 곳곳에 웃음꽃을 피워냈다.
2주에 한 번 찾아오는 권씨는 주민들에게 반갑고 고마운 손님이다. 2011년 승봉도에서 주차해둔 권씨의 트럭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에 타 전소됐다. 현장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함께 눈물을 훔쳤다. 석 달이 넘도록 장사를 하지 못한 권씨에게 섬마을 주민들은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고마운 손님들에게 빚을 질 수 없었던 권씨는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고 다시 섬으로 향했다.
사과를 가득 싣고 덕적도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20여 년 간 이것저것 담다 보니 지금은 조수석까지 가득 채우게 됐다. 트럭을 몰며 두 딸을 시집보내기도 했다. 이날 장사를 마치고 선착장에 차를 댄 권씨는 “무릎도 아프고 손목도 돌아가고 올해가 마지막일 수 있어. 이제는 이 트럭을 캠핑카처럼 고쳐서 전국 방방곡곡 원 없이 돌아다니다가 좋은 자리 있으면 자리 잡고 여생을 보내고 싶어”라고 말했다. 별빛 아래 잠자리를 마련한 권씨는 오늘도 트럭에 꿈을 싣는다.
승봉도=사진·글 이한결 기자 alwayss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