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기억될 그 목소리…“여기는 ‘송해’ 길입니다”

입력 2022-06-10 00:01 수정 2022-06-10 00:01
송해길 입구에 '여기는 송해길입니다'라는 환영 문구가 시민들을 반긴다. 김민영 인턴기자

‘국민 MC’ 송해가 향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소탈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함께했던 그였기에, 시민들은 송씨의 빈자리를 더 크게 느끼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송씨의 아지트였던 낙원동 일대는 고인을 떠나보낸 슬픔과 충격에 시종 적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울 종로3가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 웃고 있는 송해의 얼굴이 9일 시민들을 반겼다. 송해의 동상이 세워진 ‘송해길’에는 그가 자주 다니던 한의원, 식당 등에서 보낸 근조화환이 줄지어 있었다. 추모객들은 바구니에서 흰 국화를 들어 헌화 후 묵념했다. 이 일대를 지나던 직장인, 학생, 어린아이들도 한동안 추모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송해길'에 8일 세상을 떠난 국민MC 송해를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예솔 인턴기자

송해는 서울 매봉역 인근 자택에서 그가 설립한 ‘연예인 상록회’가 있는 종로3가까지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그런 그는 종로3가의 유명인사이자 종로 주민들의 친구였다. 그가 사라진 종로 일대는 이날 종일 내린 비 때문인지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다.

종로 3가 일대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그의 이름 ‘송해’가 들려왔다.

“대한민국 땅에서 ‘전국노래자랑’ 안 본 사람이 어디 있어.” 한참 동안 송해 동상과 흰 국화꽃을 보고 있던 A씨(70대·남)가 말했다. A씨는 송해에 대해 “국민들과 교류가 많이 있었잖아. 진정한 국민 MC”라며 “시민과 소통하고 국민의 어려움과 애환을 노래로 승화시켜주신 분”이라고 했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송해길'에 9일 국민MC 송해를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예솔 인턴기자

B씨(60대·여)는 “종각에 살고 있어서 길을 지나가다 가끔 뵀다. 그러니 더 마음이 아프다. 인사하면 항상 받아주시던 따뜻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B씨의 부모는 송해와 같은 이북 출신이라고 했다. B씨는 “그래서 더 안타깝다”며 “피난 후에 고생도 많이 하시고 국민을 위해 기쁨도 많이 주셨는데 이제는 마음 편히 가시라고 전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마칠 때쯤 그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

C씨(80대·남)는 ‘전국노래자랑’의 애청자였다. 그는 “추모하러 ‘송해길’에 일부러 찾아왔다”며 “주말마다 국민을 즐겁게 해준 훌륭한 어른인데, 안타깝다”고 했다.

송해가 생전 자주 찾았던 식당과 사우나가 있는 서울 낙원동 골목 모습. 김민영 인턴기자

평소 송해는 낙원동 상가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시민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이어갔다. 그래서일까, 송해길 상인들은 송해를 연예인보다 친근하고 정 많은 이웃집 어르신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송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방문해 식사하고 갔다는 단골 백반집을 찾았다. 송해길에서 5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고향원씨(73)씨는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도 왔다 가셨는데…”라며 슬픔에 젖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선생님이 된장찌개랑 더덕구이를 좋아하셨어요. 그날은 된장찌개를 드셨는데 보통 한 공기 다 드시거든요. 그런데 어저께는 반 공기밖에 못 드시더라고요”라며 자신이 본 마지막 송해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씨는 “다른 사람들은 귀찮아서 거절하는 때도 있는데 손님들이 선생님께 사진 한 장 찍자고 하면 단 한 번도 거절한 적 없이 매번 웃으면서 찍어주셨어요”라며 생전 따뜻했던 그의 인품을 떠올렸다.

현역 최고령 MC인 방송인 송해가 별세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송해길 인근 송해 벽화의 모습. 연합뉴스

그곳에서 박길성(82) ‘송해길’ 보존회 위원장도 만날 수 있었다. 종로에서 극장을 운영하며 송해와 친분을 쌓았다는 박 위원장은 낙원동 골목에 ‘송해길’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송해길을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며 직접 주민들의 서명을 받고 구청과 공무원들을 설득하면서까지 송해길을 만든 과정을 설명했다.

녹록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송해길’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송해가 낙원동 이쪽을 매일 다니셨어. 그러니까 이 거리를 송해가 늘 다닌거야. 이렇게 송해 거리를 만들면 종로도 활기가 차고 좋은 거지”라고 답했다. 특유의 호탕한 모습으로 종로 일대를 거닐던 송해가 낙원동 거리 일대에 더 큰 활기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박 위원장은 송해와 술잔을 기울였던 추억, 함께 노래를 부르며 웃음을 나누던 기억들도 회상했다. 그러면서 “어제도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오늘도 이제 식사 마치면 갈 생각인데 이렇게 가시니까 마음이 너무 허전하다”며 비통한 마음을 드러냈다.

서울 낙원동에 송해가 생전 자주 찾았던 식당. 김민영 인턴기자

송해는 ‘매일 소주 3병’이 건강비결이라고 할 정도로 소문난 애주가였다. 송씨가 즐겨 찾던 아귀찜집 내부에는 그의 사진이 수십 장 걸려있다. 사진 아래가 생전 그의 지정석이었다. 사장 이상희(71)씨는 “아귀찜도 드시고, 아귀 지리도 좋아하시고, 술은 기본으로 빨간 뚜껑 소주를 드셨다”고 회상했다.

이씨에게 송해는 그저 손님이 아니었다. 소주를 사이에 두고 20년간 희로애락을 함께한 큰형님이었다. 송씨와 가족보다도 더 깊은 사이였다던 이씨는 “정이 있고, 자기한테는 인색하면서도 남한테는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송해가 생전 자주 찾았던 사우나다. 현재는 이름이 바뀌었지만 '송해 사우나'라는 간판이 아직도 달려있다. 김민영 인턴기자

송해의 건강 비결 중 하나는 목욕이다. 낙원동에 27년째 자리잡고 있는 ‘낙원동 사우나’에는 지금도 ‘송해 사우나’라는 간판이 입구에 남아 있다. 송해가 매일같이 오다 보니 붙여진 이름이다.

50대 사장 진은순씨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목욕하며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누던 고인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진씨는 “사우나 냉수가 천연 암반수라 들어가 앉아 있는 게 보약이라며 자주 오셨다”며 “코로나 이후 사우나는 안 하셨지만, 근처 식당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은 자주 뵀다”고 했다.

진씨는 “세신할 때 보면 그전까지는 몸이 불어 있었는데, 2018년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갈수록 말라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송해가 생전 자주 찾았던 이발소. 김민영 인턴기자

송해는 낙원동 일대 모든 이발소의 단골이기도 했다. 송씨와 18년간 인연을 이어왔다는 한 이발사는 “송해 선생님은 종로 가게 전부가 단골이에요. 한 집에서만 (머리를) 자르면 다른 집에서 서운해하거든”이라며 그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송해는 늘 이른 아침 이발소를 찾아 눈을 지긋이 감고 머리를 내맡겼다고 한다. 이발사는 그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에 “마음이 우울하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송해길 입구에 '여기는 송해길입니다'라는 환영 문구가 시민들을 반긴다. 김민영 인턴기자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송해길'. 김민영 인턴기자

송해의 흔적이 깊게 드리운 이곳 ‘송해길’은 이제 송해의 발걸음 대신 그를 추억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진다.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며 우리를 웃게 했던 송해는 떠났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다.

황서량 인턴 기자 onlinenews1@kmib.co.kr
김민영 인턴 기자
이예솔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