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노래자랑~!” 글씨만 봐도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멘트와 ‘따따따따~’ 오프닝 음악이 귀에 들리는 듯 만든 상징 같은 MC,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전 국민이 아는 명실상부 100세 시대의 영원한 현역이었던 사람.
95세의 나이로 8일 세상을 떠난 송해(본명 송복희)는 전국 팔도를 누비며 최고령, 최장수 방송인으로 살았던 만큼 국민들에게 많은 메시지도 남겼다.
그가 지난 1월 KBS 설 연휴 특집 프로그램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에 출연했을 때다. 그는 “마음에 있는 꿈이 이뤄질 때가 있다더라”면서 “KBS와 인연이 돼 운명 같은 프로그램(‘전국노래자랑’)을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땡’과 ‘딩동댕’ 중에 뭐가 더 소중하냐고 하는데,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라는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저 역시 늘 ‘전국노래자랑’에서 내 인생을 딩동댕으로 남기고 싶었던 사람”이라면서 “‘전국노래자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은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실격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분들도 계신다. 실패를 했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시고 새해에는 원하는 바를 꼭 이루시길 바란다”고도 했다.
그는 지난달 23일 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등재돼 KBS에서 ‘등재 인증서 전달식’에서는 “긴 세월 전국노래자랑을 아껴 주신 대한민국 시청자들의 덕분이다. 여러분과 공동의 영광”이라면서 “어쨌든 건강하시고, 건강이 우선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꼭 드리고 싶은 소리는 여러분들 건강하십시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소문난 애주가였던 송해는 술과 관련한 일화로도 유명했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는 기력이 떨어지면 방송에 지장이 있을까 봐 술을 많이 줄였으면서도 “그것도 안 먹으면 인생이 적막하다”며 완전히 끊지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건강 비결로 늘 ‘전국노래자랑’을 말하곤 했다. 그가 85세였던 2012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희극인으로서 처음으로 공연을 열면서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나이쯤 되면 무엇보다 ‘내가 할 일’이 있어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면서 “몸이 아프다가도 ‘낼모레 방송이다’ 싶으면 힘이 불끈 난다”고 했다.
실제 송해의 방송인으로서의 삶은 ‘전국노래자랑’과 궤를 같이 한다. 1988년 5월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은 그는 1991년 건강 문제로 약 7개월간 하차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35년간 매주 일요일 오전 관객과 시청자를 만났다. 그가 ‘전국~’을 외치면 관중들이 ‘노래자랑~’하고 화답하는 장면은 많은 국민들의 눈과 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난해 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전국노래자랑’ 후임 MC를 누구에게 맡기겠냐는 질문을 받고 “아직도 이렇게 또렷또렷한데 누굴 줘”라며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생전 인터뷰에서 “지역 갈등, 고부 갈등, 직업 간 갈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갈등, 성별과 세대 간 갈등이 ‘전국노래자랑’에서는 해소된다”며 “이 프로그램은 ‘내 인생의 교과서’”라고 말한 것도 유명하다.
그는 생전에 낸 책 ‘송해 1927’에서도 “‘전국노래자랑’이 내가 평생 배워야 할 교과서라고 느꼈다”면서 “누가 잘하고 못 하고 꼭 재밌어야 하는 것보다, 그저 우리 생활이 묻어나는 곳”이라고 얘기했다.
1927년 4월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나 한국전쟁 때 실향민이 돼 남쪽으로 내려온 송해는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
송해가 인생 최고의 기억으로 꼽는 장면이 2003년 8월 ‘전국노래자랑 평양편’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당시 ‘한 많은 대동강’을 부르며 “다시 만납시다”라는 작별인사를 전했다. 그는 책에서 “(당시) 난 정말 지상 최대의 쇼를 했다, 그런 통쾌감을 느꼈다. 여러분에게 다시한번 그런 장면과 그런 기쁨을 보여주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그것에 너무 마음을 바치거나 휘둘리거나 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는 1994년 하나 뿐이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충격으로 생전 처음 라디오 방송을 펑크내기도 했다. 그는 가수의 꿈을 꿨던 아들이 남긴 노래들을 지난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 속에서 디지털로 복원해 처음 들었다. 아들이 가수를 꿈꿀 때 자신처럼 고생할까봐 만류했었다는 그는 “흔히 낭패를 당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만 봤지 내가 실감하지는 못했는데, (노래를 듣는데)그런 느낌이 오더라”면서 “내가 맨 먼저 생각한건 걔가 하고 싶다고 한 걸 못 해준 게 죄스러웠다”고 했다.
송해는 자신을 수식하는 수많은 말 중에 ‘오빠’가 가장 좋다고 했다. 후배들에게도 늘 오빠나 형으로 편하게 부르라며 다가섰다고 한다.
“나는 영원한 딴따라가 되고 싶다”던 송해의 ‘딴따라’ 철학도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았다.
생전에 가깝게 지낸 후배이자 한국방송코미디협회장인 엄영수(개명 전 엄용수)가 ‘송해 1927’ 속 인터뷰에서 “송해 선생님은 늘 저희에게 ‘딴따라는게 뭐냐. 대중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고 대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귀한 것이냐’면서 ‘그러니까 딴따라는 우리를 낮춰 부르는 말이 아니라 우리같이 희귀하고 귀한 사람에 대한 별칭이나 애칭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