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휩쓸던 2020년 6월, 1841년에 문을 연 미국 펜실베니아주 몬트로즈(Montrose) 연합감리교회가 문을 닫게 됐습니다. 창고를 정리하던 교회 관계자들은 비닐에 포장된 두루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세로 약 160㎝에 가로 50㎝ 정도 되는 족자였습니다. 비단 위에 소나무와 학을 한땀 한땀 수놓은 작품이었습니다. 교회 관계자들은 족자를 인근 교회 목회자인 강호식(그레이트밴드 교회) 목사에게 가져왔습니다. 동양풍의 작품인 것 같은데, 글자나 뜻을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 목사는 20년 전 서울 원천감리교회(박온순 목사)에서 파송된 선교사였습니다.
족자를 살펴본 강 목사는 몬트로즈 교회 관계자들에게 전달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00여년 전에 몬트로즈 교회에서 한국(당시 조선)에 여 선교사님을 파송했고, 그 선교사가 영변 지방에서 사역할 때 당시 지방 여선교회로부터 받은 선물 같다.”
족자에는 ‘축하 조선선교기념’ ‘영변지방 전도부인 일동 증정’ ‘민예도 귀하’ ‘주후 일천구백이십삼년 일월’ 이라는 글자가 당시 표기법에 따라 새겨져 있었습니다.
민예도 선교사의 미국 이름은 에델 밀러(Ethel Miller·1893~?)이며, 미국 감리교 소속 선교사입니다. 1918년 한국에 파송받아 1938년까지 사역한 것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기감 서부연회·한민족통일선교회가 발간한 북한교회사에는 민 선교사의 일화도 등장합니다. 1930년대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지역에 모교회 격인 신창교회 건축 때였습니다. 건축비가 부족해 공사가 중단됐을 때 평양의 무어(1860~1906) 선교사와 함께 민예도 선교사가 추가로 헌금해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몬트로즈 교회 관계자들은 강 목사를 통해 족자를 한국에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한국의 성도들이 민 선교사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기념하는 게 좋겠다고 뜻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족자는 발견된 지 2년 만인 지난 4월 24일 원천감리교회를 거쳐 충남 서천의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에 기증됐습니다.
족자를 보면서 상상해봅니다. 지금으로부터 104년전, 스물 다섯살의 꿈 많은 여 선교사는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 식민지 나라에 짐을 풀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려고요. 99년 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그가 사역하던 북쪽 지방의 전도부인들은 민 선교사에게 오래 오래 살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들여 수 놓은 족자를 선물합니다.
20년에 걸친 한국 사역을 마친 민 선교사는 고향 교회에 선물을 기증합니다. 180년의 역사를 지닌 그의 교회가 문을 닫을 때, 민 선교사가 받은 족자는 1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와 태평양을 건너왔습니다. 족자의 존재와 사연을 교계에 알린 박온순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아 순종함으로 섬긴 헌신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워진 듯해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드러내시기에 후세대에 다시 소명을 일깨우고 열매가 없어 낙심한 사역자들에게 위로하시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