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국립발레단 간판스타였지만 2018년 갑작스러운 퇴단과 함께 미국 이민을 떠났던 이동훈(34)이 4년 만에 한국 무대에 선다. 대한민국 발레축제 개막작인 M발레단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9~10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안중근 역으로 출연하는 것. 서울 마포구 소재 M발레단 연습실에서 리허설이 한창인 이동훈을 최근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났다.
“2018년 6월 국립발레단의 울릉도 갈라 공연을 끝으로 퇴단하고 11월 아내와 함께 이민을 갔었어요. 당시엔 발레를 완전히 그만둘 생각으로 떠났었는데, 지난 4년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면서 발레로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원래 비보이를 꿈꾸던 이동훈은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선생님 권유로 발레를 시작하자마자 두각을 드러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출전하는 국내 콩쿠르들을 석권한 데 이어 세종대 무용과 재학 중 러시아 페름 아라베스크 국제발레콩쿠르에서 입상했을 정도다. 2008년 9월 대학 졸업을 앞두고 국립발레단에 특채로 입단한 그는 그해 12월 ‘호두까기 인형’의 주인공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국립발레단의 다양한 레퍼토리에서 주연을 도맡으며 스타로 각광받던 그는 왜 발레를 그만두려 했을까.
부상 트라우마와 낮은 자존감에 슬럼프
“2016년 5월 ‘돈키호테’ 개막 전날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됐어요. 부상 회복 이후에도 트라우마 탓에 점프할 때마다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부상 핑계로 연습을 안 하는 것은 편했지만 살이 찐 것은 큰 스트레스였어요.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하면 부상 탓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생이 지루하게 느껴져서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강렬했습니다. 발레 이외의 인생을 찾고 싶었죠.”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내는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부부는 아내가 성장한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떠났다.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은 이동훈은 아내가 직장을 다니는 동안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래를 고민했다. 그런 이동훈에게 아내는 “오빠는 발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면서 발레 클래스를 아예 쉬지는 말라고 조언했다. 이동훈 역시 아내의 조언대로 꾸준히 연습하는 한편 프리랜서 발레리노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동안 한국에서 그를 괴롭히던 부상 트라우마도 어느새 사라졌다.
“친구 소개로 만난 아내는 처음엔 제가 발레리노인 것도 몰랐어요. 친구 결혼식에서 노래 부르는 제 모습에 호감을 가졌거든요. 아내는 제가 발레를 그만둔 이후 다시 하고 싶어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줬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제가 그동안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발레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어요. 그동안 고생한 아내와 두 아이에게 발레리노로서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도 싶었고요.”
이동훈은 발레 클래스를 하려고 들린 샌프란시스코 디아블로 발레단으로부터 게스트로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1년간 디아블로 발레단 주역으로 활동하며 자신감을 장착한 그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미국 내 주요 발레단 오디션을 준비했다. 하필이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오디션들이 2년 가까이 중단된 것이 아쉽지만 지난 2월 털사 발레단 오디션에 합격한 그는 오는 7월부터 퍼스트 솔리스트로 활동할 예정이다.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털사 발레단은 규모와 레퍼토리 면에서 미국 내에서 상위에 올라있는 발레단으로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 이현준 손유희가 주역으로 활동한 인연이 있다.
“이제는 더 오래오래 춤추고 안무도 하고 싶다”
“미국에 있는 동안 부상 트라우마가 사라진 것과 함께 낮았던 자존감이 높아진 것도 제가 발레를 다시 할 수 있었던 요인이에요. 한국에 있는 동안 저는 신체조건이 발레리노로는 좋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 선이 예쁘지 않다는 지적에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 발레 무용수의 피지컬이 획일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예전에는 35~40살 사이에 커리어를 마무리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 오래오래 무대에서 춤추고 싶어졌어요. 나이를 먹었지만, 저 스스로는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걸 느끼거든요. 그리고 미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콩쿠르 출전용 소품 안무를 짜면서 본격적으로 안무도 도전하고 싶어졌습니다. 미국 발레단의 경우 대부분 상주 안무가가 있는 등 안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환경입니다.”
이번 한국 무대는 털사 발레단 입단을 앞둔 그가 이사를 마치고 가족이 몇 달간 한국에서 체류할 계획을 세웠을 때 M발레단의 제안을 받아 성사됐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의 안무가인 문병남은 과거 국립발레단 부감독을 역임한 만큼 이동훈의 한국 무대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이동훈이 발레를 테마로 올린 영상이 국내 발레 팬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그를 다시 보고싶다는 목소리가 커진 상황이었다.
이동훈은 “지난 3월 출연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는 생각도 못했던 한국 무대라 거절했다. 안중근 역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레리노로 다시 돌아온 모습을 한국 관객에게도 보이고 싶어서 출연하게 됐다”면서 “이번에 상대 역인 김지영 누나와 국립발레단 시절 파트너로 자주 춤을 췄는데, 당시 발레리노로서 파트너링이 약한 것에 대해 지영이 누나로부터 지적을 많이 받으며 훈련했었다. 결과적으로 그게 미국에서 큰 도움이 됐다. 개인적으로 이번 무대를 통해 호랑이 같던 지영이 누나에게 그동안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공연을 계기로 앞으로 한국 무대에서도 기회가 되면 종종 서고 싶다”면서 “발레를 다시 시작한 만큼 이제는 잊힌 무용수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