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초레어템’ 역대 대통령 시계 이야기

입력 2022-06-05 00:05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 카(Edward Hallett Carr)


지난달 25일 윤석열 대통령 기념 시계가 공개됐다. 윤 대통령은 “날짜 숫자 다 빼고 심플하게 만들었다”며 국민희망대표 19명을 용산 대통령실에 초청해 시계를 증정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배우 오영수 씨와 장애를 극복한 후 피트니스 선수로 재기에 성공한 김나윤 씨, 매년 익명으로 1억 원씩 기부해온 박무근 씨, 3년간 모은 용돈 전액 50만 원을 달걀로 기부한 육지승 군 등이 ‘윤석열 시계’의 첫 주인이 됐다.

대통령실 제공

시계 앞면에는 ‘대통령 윤석열’이라는 서명과 함께 봉황 무늬가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대통령 취임식 슬로건이었던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 문구가 새겨졌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실사구시(사실을 기반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세)’ 국정철학을 반영해 시계를 심플하게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시계

대통령 기념 시계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대통령 기념 손목시계는 제작 단가가 2만~5만 원 정도로 싸고 상징성이 있어 인기가 많았다. 박 전 대통령의 시계는 흔들면 자동으로 동력이 생기는 기계식 자동 시계로 유명했다. 1970년대 새마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격려한 뒤 시계를 선물로 준 것이 시초가 됐다.

이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어서 기념 시계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시계는 공식적인 대통령 기념품이 됐다. 그러나 소규모로 제작해 나눠줬기 때문에 권력과의 친분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겨지곤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계(왼쪽 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 시계(오른쪽 위 사진)와 노무현 전 대통령 시계(오른쪽 아래 사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시계는 다른 숫자 없이 ‘0’과 ‘3’만 새겨져 있어 ‘영삼 시계’로 불렸다. “YS시계 하나 차지 못하면 팔불출”이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앞면엔 한자 이름을, 뒷면엔 좌우명 ‘大道無門(대도무문, 큰길에는 문이 없다)’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세계화에 발맞춰 시계 뒷면에 영어를 표기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을 기념해 시계 2종을 추가로 만들었다. 양 김 대통령 때부터 시계를 대규모로 제작해 선물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이후 대통령 시계는 일반적인 기념품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각형 손목시계를 처음 선보였다. 시계 뒷면에는 ‘원칙과 신뢰, 새로운 대한민국 노무현’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대통령 이름만 새기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위쪽부터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 시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계는 취임 초부터 가짜가 대량으로 유통돼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청계천에선 가짜 ‘이명박 시계’ 1300여 개가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가짜를 제작해 판매한 상인들이 무더기로 적발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 “권력의 상징처럼 비칠 수 있는 기념 시계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2013년 광복절 이후 청와대 방문객 중 일부 인사들에게만 기념 시계를 선물했다.

2020년 3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이만희 교주가 박 전 대통령 서명이 새겨진 금색 시계를 차고 나와 논란이 됐다. 이에 박 전 대통령 측은 “금색 시계를 만든 적이 없다”며 가짜라고 반박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취임 직후 8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시계는 ‘이니 시계’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뒷면에는 선거 슬로건이었던 ‘사람이 먼저다’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집권 초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시계 물량을 제한했기 때문에 수요보다 공급이 적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조차 시계를 구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비매품인 대통령 시계는 오직 중고시장을 통해서만 거래할 수 있다. 보통 10만~20만 원 사이에 거래되지만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오래됐거나 지지층이 확실한 대통령의 시계는 비싸게 거래된다. 5월 9일에 임기를 마친 문 전 대통령의 시계는 현재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계는 무려 100만 원에 거래됐다.

배규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