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달이 3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스타드 롤랑가로스에서 열린 프랑스오픈 남자 단식 8강전에서 디펜딩챔피언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1위)를 3대 1(6-2 4-6 6-2 7-6)로 꺾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나달은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오픈에서만 5연패 1번(2010~2014년), 4연패 2번(2005~2008년, 2017~2020년) 도합 13차례 우승을 차지한 클레이코트의 황제로 2년 만에 우승컵 탈환을 노린다.
두 레전드의 메이저 실적을 고려할 때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맞대결이었다. 동시에 2년 전 결승, 지난해 4강, 올해 8강으로 점차 앞당겨진 대결 순서는 두 전설의 여정이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했다. 당초 나달의 발 부상 이슈와 앞선 라운드 좋았던 조코비치의 컨디션이 대조적이라 조코비치 승리 전망이 우세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 흙신은 흙신이었다. 경기 전반을 깔끔하게 리드하며 지난해 4강 맞대결 패배를 고스란히 설욕했다.
조코비치의 서브게임으로 시작한 1세트는 첫 게임부터 거듭된 듀스 랠리 끝에 10분 24초 만에 나달이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16강까지 자신의 서브게임 52번 중 단 3차례 밖에 뺏기지 않았던 조코비치였지만 나달은 1세트에만 2차례 상대 서브게임을 가져오며 6-2로 손쉽게 첫 세트를 따냈다.
2세트 첫 게임은 더 접전이었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두 라이벌은 13분 23초나 혈투를 벌였고 과감한 네트플레이로 기선을 제압한 나달이 초반 흐름을 가져갔다. 조코비치의 드롭 발리를 무너뜨리는 환상적 대시로 재차 조코비치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하며 나달이 3-0까지 기세를 올렸지만 조코비치는 그냥 무너지지 않았다. 곧바로 나달의 서브게임을 따내 추격의 시동을 걸더니 나달의 흐름을 무너뜨리며 6-4로 역전, 2세트를 가져왔다.
3세트는 나달이 첫 게임을 비교적 손쉽게 러브 게임으로 브레이크하더니 1세트와 유사한 흐름 속 세트스코어 6-2로 따냈다. 이어진 4세트는 벼랑 끝에 몰린 조코비치가 초반 집중력을 발휘하며 3-0으로 분위기를 잡았지만 나달의 뒷심이 더 매서웠다. 좌우로 조코비치를 흔든 뒤 포핸드 크로스로 브레이크에 성공하며 9게임 만에 게임 스코어를 5-4로 뒤집었다. 현지 시간으로 자정을 넘긴 6-6 타이브레이크 상황, 서브와 스트로크 모두 흔들리는 조코비치를 상대로 격차를 벌리더니 기막힌 백핸드 다운 더 라인을 적중시키며 4시간 12분이 걸린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이날 승리로 나달은 조코비치와 통산 맞대결 전적을 29승 30패로 보다 근소하게 좁히는 데 성공했다. 롤랑가로스에서의 상대 전적은 10전 8승 2패로 나달이 압도적 우세를 유지했다. 물론 나달의 프랑스오픈 통산 성적이 109승 3패로 무적에 가깝지만 그 3패 중 2패를 안긴 조코비치 역시 대단할 따름이다.
나달의 준결승 상대는 세계랭킹 3위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다. 즈베레프는 8강에서 ‘나달의 후계자’로 꼽히는 스페인 신성 카를로스 알카라즈(6위)를 3대 1(6-4 6-4 4-6 7-6)로 제압하고 2년 연속 프랑스오픈 4강에 올랐다. 나달처럼 클레이코트에 강점을 보이는 알카라즈가 상성이나 최근 기세 면에서 더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즈베레프와 만나게 됐다. 상대 전적은 나달이 6승 3패로 앞서고 있다.
즈베레프와 함께 차세대 빅3로 꼽히는 다닐 메드베데프(2위‧러시아)와 스테파노스 치치파스(4위‧그리스)는 모두 16강에서 탈락했다. 8강 반대편 블록에는 7위 안드레이 루블레프와 8위 캐스퍼 루드 등이 남아있지만 클레이코트에서 무게감은 다소 떨어진다. 즈베레프만 4강에서 넘어선다면 ‘흙 만난 나달’의 우승 가능성은 치솟을 전망이다.
나달이 14번째 롤랑가로스 우승컵을 거머쥔다면 수년 간 이어온 ‘페‧나‧조(로저 페더러‧나달‧조코비치)’의 테니스 GOAT(역대 최고 선수) 경쟁에도 큰 균열이 발생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세 선수의 메이저대회 우승 횟수는 20회로 동률을 이뤘지만 올해 초 호주오픈에서 나달이 우승하며 먼저 치고 나간 상황이다. 나달이 이번 대회에서 22번째 그랜드슬램 수집에 성공한다면 격차는 한층 벌어지게 된다.
가장 고령인 ‘황제’ 페더러는 2018년 이후 메이저 우승을 추가하지 못해 3강 구도에서 먼저 밀려난 양상이다. 조코비치의 기량은 여전하지만 백신 미접종을 천명한 이유로 대회 출전이 다소 제한적이라 올해 우승 횟수(1회)에서도 나달(3회)에 밀리고 있다. 나달로선 안방이나 다름없는 롤랑가로스에서 역대 최고 선수를 향해 한 걸음 더 도약할 절호의 찬스를 맞았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