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즈음이었다. 잘 준비를 하던 채민주(가명·20대·여)씨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날아왔다. 오밤중에 카톡이라니. 무심코 휴대폰을 들어 올려 대화창을 열었다. 헉. 웬 중년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클로즈업 사진 속 그는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채씨를 노려봤다. “나랑 놀래?” 그가 보낸 메시지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채씨가 트라우마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심리상담센터의 대표였다. 센터에 갔다가 얼굴을 마주친 적은 있어도 사적으로는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자신을 상담해주던 사람도 아니었다. 당연히 이름도 몰랐다. 놀란 채씨는 왜 이런 걸 보내느냐고 따질 새도 없이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그는 “흉하고 소름 끼쳤다”며 “그 일 때문에 거의 정신병이 생겨서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고 취재진에 설명했다. 채씨는 성폭행 피해 충격을 호소하며 윤씨의 센터에서 심리상담을 받던 사람이었다. 이슈&탐사팀이 앞서 전한 사례에서 ‘19금 상담’ 피해를 호소한 여성처럼 채씨도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센터는 이름난 곳이었다. 이곳 상담사들은 심리학 등 관련 석박사 학위에 수련(전문훈련) 경험을 두루 갖춘 이들이었다. 게다가 한국여성민우회가 협력기관이라며 소개한 상담소였다. 번듯한 심리상담센터에서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순전히 실수였다는 게 센터 대표 윤희준(가명)씨의 해명이다. 지인들과 어울리던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보내려던 메시지를 술에 취해 채씨에게 잘못 보냈다고 한다.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윤씨는 사과도 없이 카톡 대화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러면 자기가 보낸 사진과 메시지가 대화방에서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때 채씨를 친구 목록에서도 차단했다. 밤중에 내담자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간 또 다른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고 윤씨는 설명했다.
내담자를 충격에 빠뜨린 ‘카톡 사건’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윤씨는 입을 꾹 다물었다. 채씨를 담당하는 상담사에게는 물론이고 실질적 운영자이자 대표 상담사인 아내에게도 숨겼다. 이 문제는 채씨가 담당 상담사에게 말하고서야 공식적으로 센터에 알려졌다. 센터장 김수진(가명)씨는 남편과 센터 측 잘못을 모두 인정하며 “날 밝았을 때 센터 차원에서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내담자가) 실수라고 생각해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내 번호가 왜 당신 폰에
카톡을 보낸 건 실수였다고 치자. 정말 추파를 던질 속셈이었다면 대화방을 나가기보단 채씨 반응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윤씨는 자기 폰에 채씨 번호를 갖고 있었을까. 그는 상담사도 아니었다.
본래 재무 담당인 그는 내담자 응대를 함께 맡고 있었다.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나 센터로 걸려오는 전화를 상대했다는 얘기다. 윤씨는 자기 폰을 개인용·업무용 구분 없이 쓰면서 내담자 번호를 전부 저장했다. 저장된 번호는 모두 카톡 친구로 등록됐을 것이다. 채씨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윤씨의 카톡 친구가 돼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카톡 친구는 무슨 사이인가. 프사(프로필 사진)를 볼 수 있는 사이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윤씨가 마음만 먹으면 카톡 프사를 통해 모든 내담자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센터장 김씨는 “위기 상황에 처한 분들이 주로 오시다 보니 새벽에 대응할 일이 많아 카톡 채널을 운영했는데 사업 초기 윤 대표 휴대폰으로 모든 걸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원칙도 체계도 없는 주먹구구식 개인정보 관리가 부른 참사였다.
서울시내 한 심리상담센터 대표는 “저희는 전화 받는 직원도 심리상담 석사 졸업생”이라며 “많은 고민을 하고 상담을 신청하는 내담자의 특성상 피크타임을 놓칠 수 있는 만큼 전화 받는 사람의 초기 응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뒤늦은 사과
윤씨의 센터는 사건 발생 이후 한참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았다. 실질적 운영자인 김씨는 “채민주님이 필요한 부분이 뭔지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드렸지만 답변이 없어 그 상황을 양해해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채씨는 성폭력 사건 법적 절차에다 건강문제까지 겹쳐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해 12월 민우회를 찾아가 상담기관 변경을 요청했다. 카톡 사건은 이때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센터는 지난해 3월 민우회로부터 첫 공문을 받고서야 공식 사과문과 재발 방지 조치 서약문을 내놨다. 윤씨를 내담자 대응 업무에서 즉시 배제하고 전담 직원을 두기로 했다. 약속이 지켜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윤씨는 전담 직원을 새로 채용한 그해 5월 말까지 내담자 대응 업무를 계속했다. 센터장 김씨는 “심리학 지식이 있는 여성 코디네이터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해명했다.
다른 성폭력상담기관에 해당 사건을 공유하라는 요구엔 머뭇거렸다. 민우회 공문만으로는 당사자인 채씨가 직접 동의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상담윤리상 내담자 사례를 함부로 노출시킬 수 없다는 논리였지만 채씨 신상을 익명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대표가 일으킨 사례가 외부에 알려졌을 때 그 자신이 받게 될 타격을 더 걱정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채씨 신상은 감춰도 대표 신상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4월 말 민우회는 센터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협력 관계를 중단했다.
상담윤리는 법보다 못한가
“법률적으로는 아무 잘못이 없거든요.” 지난 17일 취재진과 통화한 17분 동안 윤씨는 ‘법률적으로’라는 표현만 7번 사용했다. “법률적인 문제로 가면 사실 저는 아무 잘못이 없거든요.” “법률적으로는 이게 쟁점이 될 수 없고요.” “법률적으로는 제가 잘못한 거 없어요. 진짜요.” 윤리적으로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런 얘기를 반복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지 발뺌을 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일이 커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당사자가 들었다면 사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윤씨는 생각지도 못한 연락을 받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센터장 김씨는 남편과 달리 잘못을 전적으로 인정했다. 카톡 사건 전후 사정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도 김씨였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되게 큰 2차 피해라고 생각을 해요. 기관에서도 핸드폰이랑 이런 부분을 잘 관리를 못한 부분도 분명히 있고요.” 그는 사건 직후 채씨에게 직접 사과할 골든타임을 놓친 사실을 거듭 자책했다.
김씨는 “지난해 7월 초 상담이 종결될 때까지 저희 기관에서 모든 상담비를 지원해드리기로 약속했고, 내담자분도 상담을 받겠다는 의견을 주셨다”며 “상담받을 땐 대표가 자리를 비울 수 있도록 조치까지 해드린다고 했는데 이후 연락이 없어 진행하지 못했다”고 했다. 채씨는 취재진에 “그 사람(윤씨)이 대표인데 저 올 때만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무서워서 못 갔다”고 말했다.
‘네 탓 상담’에 죽음까지 생각했다
“성희롱, 성추행은 희연씨의 제스처나 분위기가 성적 매력이 있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면이 있어서 생기는 거예요.” 성범죄 피해로 트라우마를 겪는 최희연(가명·여)씨에게 그 남자는 이걸 상담이라며 늘어놨다고 한다. 최씨는 상담사 정석준(가명)씨에게 30차례가량 상담을 받는 동안 “여성호르몬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건 선천적인 것 같아요” “상담사가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가 돼야 하니 당분간 남자친구를 사귀지 마세요” 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최씨는 “정말 내 잘못인가, 나는 성범죄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상담사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서 차라리 몸을 팔아야겠다거나 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트라우마와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 불면 등을 겪던 중 심리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정씨를 만났다.
정씨는 일대일 상담 도중 최씨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말 안 할 거면 뭐 하러 왔느냐”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최씨는 이 상황이 성폭력을 당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그는 남자가 욕하거나 고함을 치면 몸이 굳고 과호흡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최씨는 “너무 무서웠다”며 “그때(피해 당시) 상황으로 돌아간 거 같아 몸이 굳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술친구인지 상담사인지
함께 술을 마시며 상담한 적도 있었다. 최씨가 “상담이 힘들어 술 마시면서 얘기하고 싶다”고 하자 정씨는 “같이 먹어줄 테니 다음 상담 땐 원하는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혼자 마시며 상담을 받기도 했고, 술이 남으면 보관도 해줬다. 하루는 당연히 괜찮은 줄 알고 술을 가져갔는데 이때는 또 난색을 표했다. 술을 마시고 가는 건 말리지 않았다. 최씨는 “술 마시고 가도 상담이 되느냐고 몇 번 물었는데 ‘어떡하겠느냐. 그래도 상담은 와야지’라고 해서 갔다”고 취재진에 말했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던 그는 6개월간 끊었던 술을 상담 이후 다시 찾게 됐다고 한다.
최씨는 지난해 6월 말 항의하고 상담료를 돌려받았다. 자신이 상담 중에 겪은 일을 정리한 글에 서명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지만 정씨는 거부했다. 취재진은 30일 정씨에게 전화로 사실관계와 입장을 물었다. 깊은 한숨만 들려왔다. 반복되는 정적 끝에 “오늘은 밤까지 일해야 돼서 (통화가) 안 된다”고 말했다. 착잡해 하는 목소리였다. 다음 날 오전부터 오후까지 3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
정씨는 한 유명 심리상담센터의 집단상담에도 주요 상담사로 참여하고 있다. 해당 센터 대표는 “정씨는 제 직원이 아니다. 두 분 사이 상담 내용은 제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도 상담윤리보다 법이 우선이라는 듯 “법적 기관 등을 통해 분명히 가리기 전에는 (정씨의 상담에) 문제가 있다, 없다를 말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전문가들은 2차 가해성 발언은 물론 상담사가 내담자와 술을 마신 사실에 고개를 내저었다. 한국상담심리학회와 한국상담학회 1급 자격을 모두 보유한 한 심리상담센터 대표는 “도박 중독자한테 ‘도박하러 가자’거나 성 중독자한테 ‘야한 걸 한번 같이 보자’고 하진 않지 않으냐”며 “알코올을 성이나 도박으로 바꿔보면 말도 안 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담자와는 상담이 끝나고도 2~3년간은 술을 같이 안 마신다”고 덧붙였다. 각 학회 윤리강령은 상담사와 내담자 간 사적관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 센터 대표는 “학회 자격 취득 과정에선 (내담자와 술을 마시는 건) 분명히 아니라고 배운다”며 “알코올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술을 마시고도 안 마셨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땐 ‘술 깬 상태로 오셔야 한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심리학 석사 과정 수료자다. 홈페이지 등에 따로 밝혀 놓은 자격은 없다.
전자발찌 차고 상담
상담 분야 양대 학회는 윤리강령에서 상담자가 성추행 성희롱은 물론 어떤 식으로도 내담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성적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다. 내담자 가족과도 안 된다고 할 정도다. 상담이 끝났더라도 최소 2~3년은 내담자와 성적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상담실 밖에서 사적으로 교류하는 것도 금기사항이다. SNS 친구도 맺지 말라고 한다. 또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도 규정했다.
하지만 지키고 말고는 상담사 개인에게 달렸다. 윤리강령을 어기더라도 상담소 문까지 닫게 할 권한이 학회에는 없다. 학회 소속 상담사라면 사안별로 자격 영구박탈까지 가능하지만 상담소 운영은 자격증이 없어도 가능하다. 학회 소속 상담사가 아니라면 문제조차 삼을 수 없다. 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면 정부가 대신 나서주지도 않는다.
상담자가 내담자나 제자인 수련생을 상대로 저지르는 성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내담자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많고, 수련생은 자신을 지도하는 상담자를 거스르기 어렵다. 상담자가 권위자일수록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우가 많고 이런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쉽지 않다고 현장 상담사들은 말한다.
‘사이코드라마치료’로 유명했던 심리상담가 김모씨는 2017년 2월부터 3개월간 내담자를 8차례 추행하거나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받았다. 재난심리상담 분야 국내 권위자로 꼽히던 한 대학교수는 박사과정을 밟던 제자를 2014년 12월부터 2016년 5월까지 14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그루밍’(길들이기) 성범죄로 판단했다.
성범죄를 저질러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심리상담소 운영을 막을 길이 없다. 자격 요건이 따로 없어 사업자등록만 하면 누구나 심리상담소를 차릴 수 있다. 정말 아무나 차릴 수 있다. 지난해 5월엔 강제추행과 강간 전력이 있는 50대 심리상담사가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를 찬 채로 심리치료센터에서 또다시 성범죄를 저질렀다.
김희수 한국상담학회장은 “전문가가 아닌데 상담을 하거나 전문가 중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오래된 학회가 가진 순기능이 있지만 (모든 문제를 막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을 막으려면 법제화를 통해 그 테두리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내담자가 상담료를 내고도 상담사에게 끌려다니는 일을 방지할 수 있도록 (기준을 세워) 내담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음의 병원’이어야 할 심리상담소는 어쩌다 이렇게 엉터리와 범죄자가 넘쳐 나는 도떼기 시장이 돼버린 걸까. 다음 화에서 그 원인을 진단한다. 거기엔 정부의 모르쇠, 정치권의 무관심, 그리고 이해집단 간 밥그릇 싸움이 있었다.
이슈&탐사팀 강창욱 이동환 정진영 박장군 기자 issue@kmib.co.kr
※‘우리만 몰랐던 상담시장 X파일’ 시리즈는 국민일보 홈페이지 이슈&탐사 코너(www.kmib.co.kr/issue)에서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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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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