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투약→시신 유기’ 의사에 “면허 재발급” 판결

입력 2022-05-30 09:55 수정 2022-05-30 11:16

업무상 과실치사, 마약류관리법 위반, 사체유기, 의료법 위반.

산부인과 의사 A씨가 2013년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인정된 죄목들이다. 그는 2012년 지인에게 수면유도제를 불법 투여했다가 환자가 사망하자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살았고, 의사면허도 취소됐다. 하지만 법원은 당시 사건 이후 A씨가 10년 동안 충분히 뉘우치고 반성했다는 이유로 “의사면허를 다시 발급하라”는 취지로 판시했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김순열)는 전직 의사 A씨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낸 면허 재교부 거부처분 취소 소송을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이 취지대로 소송이 확정되면 복지부는 A씨에 대한 의사면허를 다시 내줘야 한다.

서울의 한 병원 원장이던 A씨는 2012년 7월 ‘잠을 편하게 푹 잘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 프로포폴과 유사한 향정신성의약품 미다졸람과 전신마취제 등을 섞어 불법 투여했다. 지인은 약물 부작용에 따른 호흡 정지로 사망했다. 사인은 ‘다수 약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중독의 기전으로 인한 호흡 정지’였다.

A씨는 지인이 숨진 사실을 확인하자 지인 차량에 시신을 실은 뒤 서울 서초구의 한 공원에 차량을 내버렸다.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A씨는 자수했다. 그는 징역 1년6개월의 형기를 치르고 2014년 2월 출소했다. 복지부는 그해 7월 A씨의 의사면허를 취소했다.

면허 재교부 제한 기간인 3년이 지난 2017년 8월, A씨는 복지부에 의사 면허를 내달라고 신청했다. 복지부가 이를 거부하자 A씨는 지난해 3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A씨 측은 재판 과정에서 “오랜 시간 자숙하면서 깊이 반성했다”며 “의사 면허 취소로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이 너무 크고 가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거로 의료법 65조 2항을 들었다.

‘면허 취소의 원인이 된 사유가 없어지거나 개전(改悛)의 정이 뚜렷하다고 인정되면 면허를 재교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의사 면허가 ‘철통 면허’로 불리는 근거다. A씨는 이를 근거로 일부 혐의는 면허 취소 사유가 되지 않는 데다 면허 재교부 제한 기간도 끝났다고 강조했다.

1심 재판부는 A씨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비록 중대한 과오를 범했지만 개전(改悛)의 정이 뚜렷한 의료인에게 한번 더 재기의 기회를 줘 자신의 의료기술이 필요한 현장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의료법 취지와 공익에 부합한다”며 A씨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A씨가 사건 이후 보낸 시간을 꼼꼼히 살폈다. A씨가 아내와 이혼하는 등 가정이 파탄된 점, 10년 가까이 의료기기 판매업·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등을 하면서 생활한 점, 유족들에게 배상금이 지급된 점 등을 유리하게 판단했다. 특히 일부 약병이 진열장에 잘못 정리돼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실수로 주입한 것을 A씨가 현재까지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도 언급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복지부가 A씨 면허 재교부를 거부하는 과정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봤다. 명확한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처분 당사자가 처분 취지를 알고 있었다거나, 이후에 알게 됐다고 하더라도 행정청이 ‘이유 제시 의무’를 위반한 건 달라지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도 인용했다.

2020년 국정감사에서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복지부 ‘최근 10년(2011~2020년) 의사면허 재교부 신청·교부 현황’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103건 중 100건이 승인돼 재교부율이 97%에 육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 의사는 면허 취소 처분을 받은 뒤 재교부 신청을 해 다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은 셈이다. 다만 A씨의 경우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복지부마저도 재교부 신청을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