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인 5월 11일,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그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잠수 시작. 답신을 못해도 양해 바랍니다’
장 의원은 윤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인수위 과정에서 당선인 비서실장을 맡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던 만큼 중압감도 컸던 것 같다. 그는 주변에 “대통령 취임식만 마치면 잠수에 들어갈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5월 10일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장 의원은 지역구가 있는 부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짐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고는 서울을 멀리하고 부산에 머물렀다. 개국공신의 ‘몸조심’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그랬던 그가 다시 등장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이 별세하자 윤 대통령이 장 의원을 대통령 특사로 UAE에 15일 파견한 것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UAE는 중동 외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국가”라며 “윤 대통령이 최측근인 장 의원을 특사로 보내면서 UAE에 예우를 다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호출하면서 그의 잠수는 일단 중단된 셈이다.
UAE로 떠나는 날, 장 의원과 전화통화를 가졌다.
-윤 대통령 특사로 UAE에 가게 됐는데.
“대통령실이 밝혔듯이, 윤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가는 것이다. 6·1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왔다갔다하면서 비행기에서만 2박을 하는, 무박 3일 일정으로 조문을 가게 됐다.
특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잠수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잠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이유는.
“윤석열정부가 공식 출범하면서, 당선인 비서실장의 역할은 끝났다. 역할이 끝난 사람은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고, 과도한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수’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특히 당선인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이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잠수라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역할마저 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6·1지방선거를 잘 치러야 한다. 국민의힘은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내 지역구(부산 사상)에서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
또, 국민과 지역구민을 위해 의정활동도 열심히 할 것이다.”
-윤석열정부의 성공을 위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윤석열정부는 경륜 있고 실력 있는 분들로 구성됐다.
이제는 윤석열정부의 성공을 위해 묵묵히 밑에서 받치고, 지원하고, 응원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정부가 최고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국회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다시 전면에 등장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은데.
“윤석열정부에서 어떤 자리나, 어떤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솔직히, 당선인 비서실장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윤석열정부 5년의 밑그림을 그리는 기회를 가졌던 것은 막중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경험이었고 영광이었다.
당시, 윤 당선인과 긴밀히 소통하고 신뢰를 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여한 없이 일할 수 있었던 데 대해 너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윤석열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정부가 될 수 있도록 국회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진심이다.”
“여의도 인연 끊어질 각오하고, 이를 악물고 인사해야 한다”
‘감사’와 ‘영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지만, 당선인 비서실장으로 일하면서 마음고생도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 의원과 가까운 한 국민의힘 의원의 전언.
“장 의원이 개각과 대통령실 등 인선 내용을 알려주지 않아 동료 의원들로부터도 원성을 많이 샀다. 특히 몇몇 의원이 집요하게 인선 내용을 묻자 장 의원이 ‘그렇게 궁금하면, 당선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얘기가 돌면서 장 의원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이 극에 달했다.”
장 의원은 자신이 의지하는 일부 선배·동료 의원들에게는 힘든 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한 선배 의원은 “인수위 때 인선 내용이 하도 궁금해 전화를 했더니, 장 의원이 ‘형님, 당선인이 저에게 ‘정치를 하면서 쌓았던 여의도 인연이 끊어질 각오를 하고, 이를 악물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하소연을 하더라. 그제야 이해가 갔다”고 전했다.
장 의원이 “이제는 묵묵히 밑에서 받치겠다”고 강조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소수다.
그가 윤 대통령의 정무특보로 기용됐다가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 정무장관을 맡을 것이라는 예상은 이제 구문에 속한다.
한 중진의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윤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계속 맡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장 의원이 잠행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장 의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탄핵 찬성파였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중도 보수 성향이라 여야 협치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면서 “그러나 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한 데다 다혈질 성격이어서,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윤 대통령을 공격할 경우 전면에 나서 싸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친윤’ 의원들과 검찰 출신 인사들 사이 ‘가교’ 역할 주목
윤 대통령을 받치는 축은 두 가지다.
먼저, 국민의힘 내부의 ‘친윤(친윤석열)’ 의원들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으로 불린다.
다른 축은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온 검찰 출신 인사들이다. 이들은 부침이 심했던 윤 대통령과 고락을 함께한 끈끈한 사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기에다 용산 대통령실의 요직을 차지한 검찰 출신 인사들이 있다.
친윤 의원들과 검찰 출신 인사들의 화학적 결합 여부에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국민의힘 영남권 의원은 “권력은 항상 내부 갈등으로 무너진다. 친윤 의원들과 검찰 출신 인사들 간의 관계 정립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민감한 이슈가 터질 때, 친윤 의원들은 ‘민심’을, 검찰 출신 인사들은 ‘윤심’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 이때 내부 충돌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친윤 의원과 검찰 출신 인사들의 가교 역할을 맡을 가장 적합한 인사로 장 의원이 1순위로 거론된다. 장 의원이 이번 인선 작업을 주도하면서 검찰 출신 인사들과 더 가까워졌다고 말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많다.
한 수도권 의원은 “여의도 정치권에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는 검찰 출신 인사들도 장 의원에게는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친윤 의원들과 검찰 출신 인사들 관계에서 장 의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앞날을 불안한 시선으로 보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보수 원로 인사는 “힘이 쏠리면, 견제가 집중되는 것이 권력의 생리다. 윤석열정부가 잘 나가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초반에 흔들리는 일이 발생하면, 정부 출범에 깊숙이 관여했던 장 의원에게 책임이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윤 대통령을 탓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윤해 정치부장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