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정태춘과 386

입력 2022-05-08 20:41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1978년 발표된 정태춘의 1집에 수록된 ‘시인의 마을’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이 노래는 시적인 노랫말과 서정적인 음률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정태춘은 1집을 가장 부끄러운 앨범이라고 했단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도피성 앨범이었다는 이유로.

정태춘은 1987년부터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1987년 청계피복노조의 일일찻집에 초대된 것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삶을 마주한 그는 전교조 집회 현장에서 ‘송아지 누렁 송아지’를 만들어 노래하고 고문과 정치폭력에 희생된 넋을 위로했다. 1990년 서울에서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이 문 잠긴 단칸방에서 화재로 사망한 사건을 애통해하며 ‘우리들의 죽음’을 만들었고, 1996년 광주 비엔날레를 반대하기 위한 ‘안티 비엔날레’를 위해서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라는 가사를 담아 ‘5·18’이라는 노래를 쓰기도 했다.

정태춘은 노래에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의 고향인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참여로 현장에서 체포돼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마다 언제나 시대정신이 깃든 노래들로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러나 정태춘은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로 대중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계속해서 앨범을 냈지만, 그가 가장 부끄러웠다는 1집 앨범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은 없었다. 그의 정치적 메시지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으며, 공연에서 ‘노래를 들으러 왔지,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그 스스로 상업적 성공보다 정체성과 신념을 택한 결과였다.

정태춘과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386세대의 지난 40년 세월은 그의 삶의 여정과 대비된다. 386세대는 시대의 아픔에 정면으로 맞서며 치열하게 20대 청춘을 보냈다. 군사정권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들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 뒤 감옥이나 군대에 끌려갔다. 전태일의 뒤를 이어 노동 현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다. 그 결과,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와 근로 3권을 쟁취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이후 386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성과를 훈장 삼아 586이 될 때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주류가 되었으나, 정체성과 신념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속적 성공과 돈을 쫓아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그 결과 군부의 총칼이 386 기득권의 높은 성벽으로만 바뀌었을 뿐, 불평등, 불공정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386이 불나방이 되어 폭주하는 동안 정태춘은 세속적인 성공을 마다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약자들을 제 발로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을 함께 어깨 걸고 노래했다. 그의 여정이 더 빛나는 이유이다.

정태춘의 음악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오는 5월 18일, 5·18 42주기에 개봉한다고 한다. 386세대인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며 폭주한 지난 세월을 반성하리라.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