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아트센터는 민간 공연장이지만 한국 연극계에서 손꼽히는 제작극장이다. 특히 2013년부터 매년 진행한 ‘두산인문극장’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 만나는 자리를 표방하며 공연·전시·강연 등을 선보이는 통합 기획 프로그램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난해 건너뛴 두산인문극장이 올해 다시 시작하며 내건 키워드는 최근 한국 사회의 주요 화두인 ‘공정’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연극 ‘당선자 없음’이 10~28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을 쓴 극작가 겸 연출가 이양구(48)를 최근 만나 작품에 대해 들어봤다.
“두산아트센터가 지난 2020년 ‘공정’이란 테마에 대해 희곡을 의뢰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제헌헌법, 즉 한국 최초의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 제헌헌법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요. 공정의 정의가 판단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해방 직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기준을 만든 제헌헌법을 연극 소재로 택했습니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은 두 달 전 5.10 총선거를 통해 꾸려진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입안한 뒤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과정을 거쳤다. 해방 이후 이념을 달리하는 여러 정치세력이 저마다 국가 수립 구상을 담은 헌법안을 내놓았지만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을 원안으로 ‘법전기초위원회에서 제출한 헌법초안’을 참고한 초안이 만들어졌다. 이양구 작가는 속기록을 비롯한 제헌헌법 관련 각종 문헌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관계된 회고록, 평전 등 비공식적 역사 자료까지 참고해 ‘당선자 없음’을 집필했다. ‘당선자 없음’은 제헌헌법이 만들어지는 이야기와 함께 또 다른 축으로 이것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PD와 비정규직 작가 등 방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헌헌법은 법을 공부한 사람에겐 관심 있는 주제지만 이걸 연극으로 만들어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지 고민도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법이나 제도 같은 것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코로나19로 공연이 처음 예정됐던 지난해에서 올해로 연기되면서 희곡을 계속 수정할 수 있었는데요. 초고에선 제헌헌법을 통해 ‘국가 만들기’라는 큰 이야기에 중점이 있었는데, 수정을 통해 회사의 운영방침과 개인의 계약 등 우리가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는 현재 이야기의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이양구는 원래 법학도를 꿈꾸며 충남대 법대를 6학기 다녔지만, 연극을 하고 싶다는 꿈을 접지 못해 뒤늦게 중앙대 연극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2008년 희곡 ‘별방’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대학로의 젊고 재능있는 연극 연출가 동인 집단인 ‘혜화동1번지’ 5기 동인으로 2011~2014년 활동했다. 이양구를 비롯해 김수희 윤한솔 등이 소속된 혜화동1번지 5기 동인들은 해방공간, 국가보안법, 해고노동자 등 한국 사회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적극적으로 선보였다. 특히 2013년 혜화동1번지가 주축이 돼 개최한 단막극 페스티벌 ‘아름다운 동행’은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대학로의 젊은 연극인들이 노동 문제에 직접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전환점이 됐다.
이양구 역시 평택기지촌 여성의 삶을 다룬 ‘일곱집매’(2012년), 파업노동자의 투쟁기를 그린 ‘노란봉투’(2014년), 청소년들의 상실과 불안을 그린 ‘복도에서, 美성년으로 간다’(2014년), 블랙리스트 의혹을 풍자한 ‘씨씨아이쥐케이’(2016년), 노조파괴 전문 법무법인의 실체를 고발한 ‘작전명: C가 왔다’(2017년), 남산예술센터를 둘러싼 공공극장 논쟁을 다룬 ‘오만한 후손들’(2019년) 등 그동안 사회성 강한 작품을 집필해 왔다. 또한, 연출가로서 고공농성 노동자의 가족을 그린 ‘이게 마지막이야’(이연주 작·2019년), 사회적 약자와 부동산 문제를 다룬 ‘집집: 하우스 소나타’(한현주 작·2021년) 등을 연출했다. 이들 작품 가운데 ‘일곱집매’ ‘노란봉투’ ‘이게 마지막이야’ 등은 당시 여러 연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 초기 작품들의 경우 사회성보다는 서정성이 강한 편인데요. 혜화동1번지 동인 시절 ‘아름다운 동행’ 페스티벌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게 됐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자발적으로 썼다기보다 의뢰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아름다운 동행’ 페스티벌을 계기로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의 손해배상 가압류 징계 문제 해결 캠페인을 벌이던 시민모임 ‘손잡고’에서 연락이 와서 ‘노란 봉투’를 쓰게 되는 등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기획 공연을 만들 때 저를 많이 찾았습니다.”
이양구 자신은 ‘서정적인 작품도 잘 쓴다’고 강조하지만, 그에게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연극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다.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해 진상조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것도 그런 이미지를 강화했다. 다만 이양구의 사회성 짙은 연극이 노동현장 등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에 대한 깊이 있는 취재와 함께 공감 가는 내러티브가 더해졌기 때문에 높은 완성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성과는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공연을 기획할 때면 그를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 둘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번 ‘당선자 없음’은 이양구가 희곡만 쓰고 극작가 겸 연출가 이연주가 연출을 맡았다. 앞서 2014년 세월호 천막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그동안 ‘쉬는 시간’ ‘이게 마지막이야’에서 좋은 호흡을 보여준 바 있다. 특히 이연주가 쓰고 이양구가 연출한 ‘이게 마지막이야’는 개개인의 일상을 ‘노동’의 관점에서 바라본 작품으로 평단과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바 있다. 이양구는 “이번 ‘당선자 없음’은 관객에게 자칫 무거운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었는데, 이연주 씨가 연출을 맡아서 풍자적이고 재밌게 풀어냈다”면서 “내가 직접 연출하는 것보다 작품의 의도를 더 잘 살렸다”고 설명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