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5년, 국격을 높인 정부로 평가됐으면”

입력 2022-05-04 15:41
정계 은퇴를 선언한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저는 주기적으로 백수를 해본 경륜 있는 백수”라며 웃었다. 최종학 기자

“첫 출마를 하던 20년 전의 마음을 돌이켜봤다. 제 소명이 욕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소명이 필요하다.”

최재성(56)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지난달 6일 밝힌 정계 은퇴의 변이다. 이번 대선 후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 정치인으로는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에 이은 두 번째 은퇴 선언이자 친문(친문재인)계 핵심 인사로는 처음이다.

동국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최 전 수석은 17대 국회부터 4선 의원을 지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2015년 분당 사태를 겪을 때 당 사무총장으로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을 치면서 힘든 시기를 함께해 ‘문재인의 호위무사’, ‘복심’으로 불렸다.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융집합연구원에서 그를 만났다. 정치인 생활을 마감하는 소회와 86세대 용퇴론에 대한 견해, 임기를 마치는 문 대통령에 대한 생각,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6‧1 지방선거 전망 등을 들었다. 전화 인터뷰도 추가로 진행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지사 출마설도 있었는데 은퇴를 발표했다.

“2016년 총선 불출마를 하면서부터 어느 시기에 어떻게 정치를 그만둬야 할지 생각해봤다. 정치를 하는 게 불가능해질 때까지 길게 하지 않겠다, 잘 정리하겠다는 얘기를 아내와 나눴다. 2004년 국회에 입성한 후 문명의 이동이라고 할 만큼 세상이 넓고 깊게 변했다. 제가 정치하면서 가졌던 생각과 이유가 일단락될 수밖에 없는 시대 변화였다.”

-정치를 시작할 때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명이 있었다고 했는데.

“정의로운 세상이 됐느냐, 불평등한 구조들이 소멸됐느냐 하면 아직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정의와 불평등 해소를 말하더라도 시대가 바뀌면서 접근 방식과 언어, 문화가 달라졌다. 김영춘 선배가 은퇴하면서 ‘생활정치’를 말했는데 저희 세대가 가졌던 거대담론에 입각한 소명과 주장, 실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저희는 민주화운동 속에서 굉장히 강하게 단련됐고, 저는 노력해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게 쉽지 않았다.”

2006년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 시절의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 왼쪽은 정봉주 전 의원. 국민일보DB

-그런 인식을 하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게 용단 아닌가. 두 분의 은퇴가 86세대 퇴장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이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86세대 용퇴론을 주장했던 송영길 전 대표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됐다.

“원래 떠난 사람한테 점수를 더 주는 법이다, 하하. 그동안 정치권의 충원구조는 크게 보면 세대 대표성과 전문성 두 가지였다. 그러나 나로부터 시작하고 누구에게나 정보가 열려 있는 디지털 문명에는 맞지 않는다. 대표자와 전문가의 퇴조 시대다. 다음 세대의 대표성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겠나. ‘포스트 586’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변화에 586이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개별적 판단의 영역이라고 본다. 특히 정세균 이낙연 대표 세대가 고문으로 물러난 민주당에는 586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모두 나가야 한다는 것보다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역할을 할 사람은 남는 각자의 몫 아니겠나.”

-86세대가 기득권이 됐다는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나.

“586의 대표성이 확장돼 해석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민주당 정치를 상당 부분 주도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만한 책임이 수반되는 것이다. 586이 세대 대표성의 마지막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한 혜택이었기 때문에 용퇴론에 억울해할 이유는 없다.”

-정치의 중심에 있다가 거리를 두면서 시각이 달라지는 부분도 있나.

“당연히 관점과 생각이 달라진다. 현역이었으면 5년 후 어떻게 다시 집권하고 윤석열정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생각할 텐데 지금은 정말 나라가 걱정된다. 권력 운용이나 의사 결정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려지니까. 당도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과정들이 보인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나 지방선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내용의 시비를 떠나 예민하고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데 구멍이 많았다. 시선이 달라지니 괜히 혼자 걱정만 는다.”

-대선 패배도 은퇴의 계기라고 했다. 왜 정권을 내주게 됐는지 복기해봤나.

“선거에서는 잘못된 정책이든 잘한 정책이든 앞으로 할 정책이든 정책으로 평가를 받는 부분이 있고, 조국 전 장관 논란처럼 정무‧정치적인 영역으로 평가받는 게 있고, 마지막으로 선거 캠페인 자체로 평가를 받는다. 정책 평가는 정권 심판론 같이 회고적 투표 성격이 있지만 후보가 좋은 비전과 공약을 내놓으면 상쇄할 수 있다. 정무적 평가 부분은 정권 교체 비율이 있음에도 대통령 지지율이 40%를 상회하는 상태에서 치렀으니 박빙게임이었다. 그래서 선거 캠페인이 조금 더 치밀했더라면 24만표 차이는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저는 지지층 결집을 위해 경선 결선투표를 권했다. 이재명 후보는 민주당 지지층 중에 역사가 오래된 ‘안티 이재명’이 있는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결선투표를 수용해 포용성을 보여주고, 한 번 더 선거를 함으로써 컨벤션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이 후보도 그렇게 입장문까지 썼는데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결국 지지층 결집이 숙제로 남은 채로 확장까지 해야 하니 표 되는 공약은 다 하려다 확실한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 2017년 대통령선거 투표 전날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종합상황본부에 들른 당시 문재인 후보가 제1상황실장이던 최 전 수석과 함께했다. 최재성 전 수석 제공

-6‧1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2016년 총선부터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까지 4연승을 달리다가 지난해 재·보궐 선거와 이번 대선에서 패했는데.

“이번 선거는 유래가 없는 특이한 상황이다.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기대 심리가 40%대로 현격하게 낮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취임 전 인수위 때 당선자의 모습이 국정 운영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집무실 이전이 예고편이 됐으니 점수를 얻지 못했다. 반면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은 대선 때보다 훨씬 좋다. 새 정부가 그래도 잘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마음이 국민의힘 정당 지지도로 갔다고 본다. 무엇보다 의제와 취임식 같은 몇 개의 시간표를 주도할 수 있는 쪽은 당선인과 그 정당이다. 새 정부 지원론이 조금 더 형성될 것이다. 민주당에 매우 어려운 선거라고 본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전체 17개 광역 시·도 가운데 9곳을 얻어야 승리하는 것이고, 경기도가 승패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경기도는 어떻게 전망하나.

“역시 어렵다고 본다.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김동연 후보 지지율이 국민의힘 김은혜 후보보다 앞서는 것으로 나오지만 김은혜 후보는 아직 정당 지지율과 새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모이지 않았다. 반면 김동연 후보는 추가 상승 여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번 검수완박도 새 정부 지원론에 기름을 부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국민의힘이 중재안에 합의한 후 걷어찬 게 민주당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상임고문이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등판할까.

“대선에서 지고 나면 쉬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데 이번에는 바로 지방선거가 있으니 이 후보에게 엄청난 고민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금 출마하거나 선거를 직접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정권을 넘겨준 후보와 당은 자기 혁신을 위한 시간과 각오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이 선거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호명당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다고 본다.”

-문 대통령의 퇴임이 며칠 남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나.

“당신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아주 정교하게 구축한 분이다. 책임 있는 판단을 하기 위한 정보 통로와 분석 과정을 잘 가동해 청와대 수석회의는 물론이고 개별 독대 보고, 개별 토론을 매일 하드하게 하셨다. 소명과 책임 의식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다. 국가 운영을 하게 되면 혁신적이기 어려운데 문 대통령의 결정은 거의 다 혁신적이었다. 충돌하는 쟁점이 있는 사안들은 항상 혁신적인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정책 결정의 경우 부동산을 비롯해 평가가 엇갈리는데, 어떤 부분을 혁신적이라고 보는가.

“정책이 성공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관성과 잘못된 문화를 바꾸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런 결정들을 많이 했다는 의미다. 탄소 중립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2050년까지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목표여서 저도 불안할 정도였지만 대통령이 결단한 것이다. 탄소 중립은 결국 기술의 문제라는 게 문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투자와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며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논리에까지 이르렀다. 아주 혁신적인 선택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후 청와대 본관 세종실에서 열린 마지막 국무회의에 앞서 열린 사전환담에서 국무위원들과 역대 대통령 초상화와 함께 걸린 문 대통령의 초상화를 보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기가 끝나는 문재인정부가 어떻게 평가되기를 바라나.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정부. 군림하지 않은 겸허한 정부. 그리고 권력을 누리지 않은, 부패와 상관없는 정부. 검찰이 그렇게 기획수사를 해도 기소한 것은 정책과 인사였다. 부패로 기소된 건 한 건도 없다.”

-부패와 상관없다고 하지만 민주당의 검수완박 강행과 문 대통령의 법안 공포안 의결을 놓고 퇴임 후 안전 보장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소위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가 돼도 문제고, 민주당이 통과를 못 시키고 좌절해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었는데 국회 합의가 상황을 변화시켰다. 문 대통령은 여야가 합의한 만큼 거부권을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퇴임 후를 걱정하거나 민주당에 대한 보복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프레임이다. 문제가 있으면 경찰이 됐든 공수처가 됐든 수사를 안 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느껴지도록 덮어씌우는 셈이다.”

-정무수석 재임 기간 동안 잊지 못할 일화가 있나.

“대통령과 단둘이 부동산 토론을 했던 기억이다. 2020년 11월에 공시지가가 올라가면서 재산세 감면 상한선을 기준가 6억원으로 할지 9억원으로 할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저 혼자 9억을 주장하며 외롭게 논쟁했다. 조류인플루엔자(AI)로 계란값이 올라갈 때는 정무수석실에서 독자 조사를 해 대책을 마련했다.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에 달걀값이 몇 차례 올라올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만큼 민생을 세세하게 챙긴 것도 있지만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대통령이 달걀값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새 정부의 초대 정무수석에게 조언을 한다면.

“정무수석은 국회에 가고 정당을 상대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강기정 수석이 정무수석에 취임하면서 ‘정무는 정책에 민심을 입히는 것’이라고 했다. 동감한다. 날것 그대로의 정책이 아니라 민심을 입혀서 보고 분석하고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에 민감해야 한다. 그렇게 안 해서 그렇지, 달걀값부터 부동산 재난지원금 공매도, 무엇이든 다룰 수 있는 자리다.”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융집합연구원에서 만났다. 국회의원과 단체장 몇 명과 함께 직접 민주주의의 구현을 고민하는 곳이다. 그는 디지털 융합 시대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질서, 수평적 리더십, 위임 권한의 과잉에 대해 말했다. 최종학 기자

-정계 복귀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

“정치는 생물이라고 한다. 주로 말을 뒤집거나 은퇴를 번복하거나 피아가 바뀔 때 많이 쓴다. 저는 정치를 숨결이라고 생각한다. 숨결은 일상적으로 항상 느껴져야 하고 막히거나 멎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한 건 정치라는 숨결을 멈춘 것이고, 스스로의 정치는 이제 마감이 됐다는 뜻이다. 은퇴 후 사회에 기여하겠다며 소위 또 대접받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저는 은퇴하면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작은 일이라도’ 찾겠다고 했다. 그게 무엇일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