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시국사건 1호 변호사의 고귀했던 삶

입력 2022-04-25 10:22

1974년, 박정희 정권은 유신 반대 투쟁을 하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겨냥해 긴급조치 4호를 발령했다. 그 주요 내용을 보자.

1. 민청학련과 관련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회합·통신·편의제공 등으로 구성원의 활동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1. 민청학련 및 관련단체의 활동에 관한 문서·도서·음반·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판매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1.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수업·시험을 거부하거나 학교 관계자 지도·감독하의 정상적 수업과 연구활동을 제외한 학내외 집회·시위·성토·농성·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행위 금지
1.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는 폐교처분 할 수 있음

어마무시하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지 않고서야 정부가 어찌 이런 조치를 발령할 수 있을까. 학생이 무단 결석이나 시험 거부만 해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고 사형까지도 시킬 수 있다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이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이들 사건으로 253명을 구속됐고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7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8시간 만에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그런데, ‘빨갱이’로 몰릴까봐 맡기를 꺼려했던 이 사건을 흔쾌히 맡았던 변호사들이 있다. 고 한승헌 변호사, 고 조준희 변호사, 고 홍성우 변호사, 고 황인철 변호사.

이들 용감했던 변호사 중 한승헌 변호사는 서슬이 퍼렇던 1960년대 중반부터 다수의 시국사건을 맡아 ‘시국사건 1호 변호사’로 불렸다. 한 변호사는 5년 동안 검사로 일하다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처음 맡은 시국사건이 남정현 작가의 소설 ‘분지’ 사건이다.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미군 병사의 성폭력 등 만행을 소재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 소설이 반미 감정을 조장한다며 작가를 ‘반미용공’으로 몰았다.

이 사건 이후로도 동백림 간첩단 연루 문인 사건,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사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 탄압 사건, 민중교육 사건, ‘즐거운 사라’ 사건 등 시국사건 변호를 주로 하다 보니 어느새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가 됐다.

한 변호사 본인이 직접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진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고 사형제를 비판하는 수필 ‘어떤 조사(弔辭)’를 한 월간 잡지에 기고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이다. 이 일로 8년 5개월 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2022년 4월 20일. 한승헌 변호사가 유명을 달리한 이날 제11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발표도 있었다. 생전에 한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말 속에 이미 인권을 지키는 직분이 들어있다’라며 인권지킴이로서의 변호사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새내기 변호사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이날을 이승에서 떠나는 날로 정한 듯이 보인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