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우크라인 디아스포라의 슬픔

입력 2022-04-25 06:00 수정 2022-04-25 12:16
서울시뮤지컬단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최근 미국의 많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연극반이 앞다퉈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올리고 있다. 1905년 제정 러시아 지배 시절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족을 다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발생한 민간인 학살과 디아스포라를 이야기하기에 좋은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롭게 올려진 이들 ‘지붕 위의 바이올린’ 프로덕션들은 관객들로부터 따뜻한 지지를 받고 있다.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1905년 포그롬, 즉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작가 숄렘 알레이헴(1859~1916)의 연작소설 ‘우유 배달부 테비에’를 원작으로 했다. 원작소설은 중유럽 유대인들의 언어로서 독일어에 히브리어와 슬라브어가 섞인 이디시어로 쓰였다. 우유 배달부 테비에가 유대인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 변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포그롬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내용이다.

19세기 후반 이디시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알레이헴은 자신의 소설을 무대화하고 싶어했다. 비록 알레이헴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은 그의 사후 꾸준히 공연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960년대 들어 작곡가 제리 복, 작사가 쉘든 하닉, 극작가 조셉 슈타인이 뮤지컬로 만들기 시작했다. 뮤지컬의 제목은 제정 러시아 시절 벨라루스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의 바이올린 연주자들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결정됐다. 샤갈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유대인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바이올린 주자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다만 뮤지컬이 알레이헴의 소설을 그대로 담지는 않았다. 소설은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뮤지컬은 미국적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뮤지컬에선 테비에 부부가 시집 안 간 딸들을 데리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소설에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당시 제정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19세기 말 ‘약속의 땅에 나라를 세우자’는 시오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에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정착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소설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온 후 또 다른 딸이 시집간 가족과의 문제 및 테비에 아내의 죽음 등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훨씬 짙다. 그리고 뮤지컬에선 러시아인과 결혼한 셋째 딸 부부가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나지만, 소설에선 러시아와 유대인 공동체 모두에서 쫓겨나는 신세다.

서울시뮤지컬단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는 당대 브로드웨이 최고 프로듀서인 해롤드 프린스와 연출가 겸 안무가 제롬 로빈스가 합류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작품이 ‘너무 유대인적’이라 주류 관객을 끌어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는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이름까지 바꾼 로빈스가 연출을 맡은 것도 뒷말을 낳았다. 그러나 1964년 초연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관객과 평단의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뮤지컬의 대표 넘버인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은 매우 중독적인 선율로 잊히지 않는다. 결국, 이 작품은 그해 토니상에서 작품상, 연출상, 대본상, 음악상 등 9개 부문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 1971년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이듬해 아카데미에서 영화음악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됐다. 서울시뮤지컬단은 1985년부터 1998년까지 6번이나 올린 바 있다. 그리고 지난해 창단 60주년 기념작으로 다시 올렸다. 다만 지난해까지 이 작품은 한국에서 가족애를 다룬 고전 뮤지컬로서 인식됐을 뿐 본질적인 주제인 디아스포라의 비극은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접점이 많지 않다 보니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잘 모른 채 딸들의 결혼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가족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다시 오른 ‘지붕 위의 바이올린’(~5월 8일까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맞물려 예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우선 한국과 미국에서 새로 무대에 오른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극 중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과거 러시아어 발음인 ‘키예프’ 대신 우크라이나어 발음인 ‘키이우’로 바꿨는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개전 이후 500만 명이 해외로 피난 가 난민이 됐으며 민간인과 군인을 합해 수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테비에가 유대인들에게 떠나라는 명령서를 가져온 러시아군 장교에게 처음으로 대항하며 “내 땅에서 꺼져”라고 말하는 모습이 큰 울림을 준다. 아마도 우크라이나인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푸틴과 러시아군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