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침공 55일째, 피란길에 올랐다

입력 2022-04-24 13:28 수정 2022-04-25 15:37
서진택 선교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55일째 되던 날인 지난 19일 가족과 함께 ‘고향’인 하르키우를 떠났다. 차량에 실린 비상식량은 길목에서 만나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에게 전도지와 함께 나눠줬다. 서진택 선교사 제공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55일째 되던 날인 지난 19일 ‘고향’인 하르키우를 떠났다고 했다. 끝까지 고향을 지키려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전쟁이 시작됐을 때보다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크라이나의 부활주일인 24일을 앞두고 서진택 선교사가 보내온 편지엔 피란길에 오른 19일부터 22일까지의 고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GMS 소속인 서 선교사는 “‘지금 있는 곳’ 하르키우에서 속히 빠져나오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피란길에 올랐다”고 전해왔다. 그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12살 때 이곳에 왔고 2013년 우크라이나 여성과 결혼했다. 하르키우는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피란길엔 아내와 두 아들, 장인 장모 등이 함께했다.

서진택 선교사는 하르키우를 떠나 1180㎞ 떨어진 이바노프랑키비츠주로 이동했다. 이 곳은 서쪽 지역 중 하르키우와 가깝다. 서진택 선교사 제공

피란길 첫날인 19일 일행은 드니프로 강을 건너 서울에서 부산 거리인 360㎞를 달린 끝에 올레크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숙소는 올레크산드리아 승리교회였다. 침공이 있기 55일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일상은 낯설게 느껴졌다.

서 선교사는 “밤 11시까지 집안에서 전등불을 켤 수 있었고 포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면서 “신호등이 작동돼 빨간불을 기다리고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게 익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튿날 피란길 여정은 계속됐다. 목적지는 빈니차였고 숙소는 생명교회였다. 420㎞를 달려 도착한 이곳에서 이틀을 보냈다.
서 선교사는 “전쟁 동안 두 아들은 또래가 없어 외로워했는데 이곳 숙소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다시 이동했다. 5시간 20분을 달려 400㎞ 떨어진 이바노프랑키비츠주에 도착했다. 고향인 하르키우에서 1080㎞ 떨어진 곳이다.

피란길에서 서진택 선교사가 촬영한 사진. 폭격을 받은 지역이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다. 서진택 선교사 제공

이바노프랑키비츠주를 목적지로 결정한 이유는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피란을 요청해 온 사역자가 있는 곳인데다 서쪽 지역 중 하르키우와 가깝기 때문이다.
서 선교사는 “이바노프랑키비츠 지역으로 진입하는데 황새들이 우리를 맞이해 주는 걸 보고 ‘이젠 진짜 안전지대구나’ 싶었다”고 했다.

피란길 내내 하나님의 보호하심도 경험했다.
드니프로강을 건너기 전까지 내리던 비는 강을 건너 동쪽보다 그나마 안전한 곳에 진입할 때쯤 그쳤다. 서 선교사는 “안개가 끼고 비가 올 때는 폭격 하는 게 훨씬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피란길에도 섬김의 자세는 잃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검문하는 곳을 지날 때면 갖고 있는 통조림 등 비상식량과 전도지를 전달했다.
서 선교사는 “우크라이나는 4월 24일이 부활절이다. 안정을 취하고 기도하면서 서쪽에서 할 수 있는 사역을 살펴보려고 한다”면서 편지글을 맺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