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등에서 23년간 검사로 일한 김범기 전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가 본인이 수사했던 초대형 무역금융 사기인 모뉴엘 사건을 예로 들어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현재 발의된 법안대로라면 당시와 같은 실체적 진실 확인이 어려워진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모뉴엘 사건 같은 사건이 재발하면 누가 수사해 사건의 전모를 밝히겠느냐, 민주당 의원들이 수사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전 차장검사는 지난 18일 “검수완박이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부정부패를 단죄하는 더 좋은 시스템으로서의 변화인지 심히 우려스럽다”는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게시했다. 그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으로 있으면서 2014년 1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모뉴엘 사건을 어떻게 수사했는지 과정을 공개하며 이처럼 지적했다.
모뉴엘 사건은 가전업체 모뉴엘이 수년간 수십 차례에 걸쳐 허위 수출을 일으켜 매출채권을 시중은행에 판매하고, 이를 허위 매출채권으로 되돌려 막는 수법으로 3조4000억원을 편취한 사건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도 큰 손해를 입어 결국 국민이 피해자인 사건이었다.
그가 모뉴엘 사건을 예로 든 것은 이 사건의 수사 과정이 법안에 숨어 있는 ‘범죄 대응 공백’을 말해준다는 생각 때문이다. 최초 적발은 서울세관 특별사법경찰이 한 것이지만 검찰의 금융범죄 수사 역량이 결합돼 관련자들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가능했다고, 김 전 차장검사는 짚었다.
그는 “명백한 사기 범행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세관은 특경법 사기로 인지할 수 없었고, 허용된 다른 법률로만 의율해 구속 송치했다”며 “국민적 의혹은 검찰에서 직접 수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특사경 역시 수사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뉴엘의 범행 수법, 피해 금융기관의 행위 이유, 무역보험공사와 수출입은행이 보증을 계속 해준 이유 등을 확인하기까지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지휘부는 금융범죄 수사 전문성이 있는 금융조세조사2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검찰이 2개월간 수사해 천문학적 사기 대출의 이면에 뇌물 공세가 있었다는 점을 밝혔고, 구속 6명을 포함해 총 10명을 기소했다. 모뉴엘의 기상천외한 뇌물 방법까지 확인한 수사 결과는 당시 큰 관심을 끌었다. 무기명 기프트카드 수십개를 담뱃갑에 넣어 전달하는 수법, 휴지나 과자 상자에 5만원권 수천만원어치를 넣어 건네는 방법도 공개됐다. 모뉴엘 회사 관계자와 무보 임원 등 4명이 하룻밤에 1400여만원의 룸살롱 접대를 받은 일도 드러났다. 대부분의 피고인은 법원에서 적지 않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 전 차장검사는 “지금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근무하는 제가 왜 7년여 전 검사 재직 시절 맡았던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겠느냐”고 했다. 그는 이어 “현 여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이렇게 수사했던 부분들을 밝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 전 차장검사는 “이런 모든 범죄수법과 내용은 모두 검찰의 직접 수사를 통해 밝혀낸 것이었고, 서울세관에 보완수사를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서울세관의 업무 범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건을 서울세관으로 내려보내 로비까지 수사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의 형사사법시스템을 촘촘히 설계하고 유지하는 것은 국가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며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 의원들, 특히 법조인 출신 의원들께 묻고 싶다”고 했다. 그는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범죄로 인한 아픔과 슬픔을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망가뜨리면 되겠느냐”고 했고, “법안을 발의하신 의원님들께서는 범죄로 피해를 보는 선량한 다수의 국민들은 보지 않는다”고 작심 비판했다.
김 전 차장검사는 의원들을 향해 “중대한 범죄를 범하고 경찰이 아닌 검찰 수사만을 피하고 싶은 범죄자들을 위해서 이런 입법을 하신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김 전 차장검사는 1997년 광주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각 지검 특수부와 금융조세조사부, 대검 중수부 등에서 다수의 중대범죄를 수사했다. 검찰 내 ‘특수통’으로 손꼽혔다.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할 때에는 김성태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딸 부정채용 의혹 사건, 손혜원 전 민주당 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혹 사건을 수사했다. 여야 양쪽을 모두 수사한 뒤부터 수사권이 없는 고검에 발령 받았고 2020년 검찰을 떠났다.
그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비록 현직 검사가 아니지만 지금은 국민들께 무언가를 설명해야 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실명으로 회자될 것을 각오하고 글을 올렸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