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민과 러시아 발레 무용수들 내한공연…왜 하필 지금인가?

입력 2022-04-19 05:59
'발레 수프림 2022' 포스터.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이 세계적인 발레 스타들과 함께 갈라 공연을 선보인다. 러시아의 마린스키 발레단 5명과 볼쇼이 발레단 4명을 포함한 7개 세계 명문 발레단 소속(출신) 22명은 8월 18~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리는 ‘발레 수프임(Ballet Supreme) 2022’에 출연할 예정이다. 러시아 문화의 상징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고립을 상징하게 된 발레 공연에 러시아 무용수 9명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관심과 우려가 교차한다.

18일 기획사 서울콘서트매니지먼트는 보도자료를 통해 ‘발레 수프림(Ballet Supreme) 2022’ 공연을 공식화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사태로 취소될 가능성이 제기됐었지만, 서울콘서트매니지먼트는 예정대로 공연을 올리기로 했다. 김기민, 마리아 호레바,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 마리아넬라 누네즈, 알리나 코조가루, 프리드만 보겔 등 현재 나온 출연진의 면면만 보더라도 한국에서 열린 발레 갈라 공연 중 규모와 내실 면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발레 수프림 2022’이 예정대로 열릴지는 미지수다. 우선 우크라이나 사태로 한국과 러시아 간 직항 항공 노선이 중단되면서 러시아 무용수들의 이동이 매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러시아가 한국을 포함해 48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한 뒤 조만간 입국 제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힌 상태라는 것이다. 입국 제한 조치를 취하면 김기민은 자칫 한국에 나올 수 없거나, 나오더라도 러시아에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김진용 서울콘서트매니지먼트 대표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하지 않길 바라고 있다”면서 “만약 러시아 무용수들의 입국이 어려워지면 그에 상응하는 지명도의 무용수들로 교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두 달째 접어들면서 세계 각국에서 러시아 보이콧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친푸틴’으로 유명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서방 공연계에서 퇴출당한 것은 대표적이다. 스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반전 메시지를 발표한 이후에야 서방 무대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5월 8일 내한공연을 갖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마슬레예프. 마스트미디어

다만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비난받아도 마땅하지만, 러시아 출신 예술가들을 모두 보이콧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친푸틴’ 성향의 예술가 외엔 자유롭게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2015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러시아 출신 젊은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마슬레예프가 5월 8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3년 만의 내한 리사이틀을 연다. 공연기획사 마스트미디어 관계자는 “전쟁 이전인 1년 전부터 예정했던 공연이며, 예술과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고 판단해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제 예술계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한국도 러시아 예술가, 특히 예술단체 초청은 당분간 지양하는 것이 낫다는 분위기다. 실제로 올 하반기 내한 공연이 예정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와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국내 기획사는 여론을 고려해 현재로선 연기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근 그리스계 러시아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이끄는 러시아 악단 무지카 에테르나의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함부르크 공연이 논란을 일으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쿠렌치스의 경우 정치적인 예술가는 아니지만 무지카 에테르나가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 VTB 은행의 지원을 받는 것이 문제가 됐다. 무지카 에테르나는 빈에서 3회 공연 중 1회는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 기금 모금을 내세웠으나 오스트리아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의 반대로 취소됐다. 여기에 올여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청된 무지카 에테르나의 공연을 취소해야 한다는 여론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발레 수프림 2022’가 우려스러운 것은 국내 거주 우크라이나인들의 시위 등으로 국제적 이슈가 되면서 한국과 김기민에게 자칫 부정적 이미지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러시아의 양대 발레단인 마린스키 발레단이나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들이 해외에서 공연한 사례가 없었던 만큼 한국 공연이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다.

장광열 무용 평론가는 “공연 참가 무용수들만 놓고 보면 훌륭하지만, 굳이 지금 같은 시기에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고통받는 지금 이 공연의 명분이 약하다”면서 “무엇보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나 역사 인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김기민에게 향할 수 있어서 걱정된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