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모 서울 강남제일교회 목사는 17일 ‘2022 부활주일 예배’를 통해 ‘부활의 증인들’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찬송가 작곡 및 예전 전문가인 문 목사는 이날 요한복음 11장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를 주제로 설교했다.
문 목사는 200자 원고지 36매 분량의 원고 전체를 설교 중계 영상 하단에 그대로 노출해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눈으로 읽도록 도왔다. 그는 “과거엔 설교를 듣기만 했으나, 현대엔 자막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라며 “자막을 읽으며 설교를 듣도록 돕는 형식을 절기 설교 때 이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문 목사의 부활주일 설교문 전문.
한 인간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다가 죽는 과정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모른 채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갑니다.
우선 인간은 왜 태어나야 했는가를 모릅니다. 내 의지대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됩니다. 평안할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이 닥치고 산다는 것이 죽기보다 더 괴로울 때 우리는 탄식합니다. “왜 내가 태어났는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옛날 유행가 가사에 “어머니 왜 나를 나으셨나요?”라는 서글픈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남자나 여자가 된 것, 김씨나 이씨 성을 가진 것,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 내 부모, 내 형제 모두가 내 의지와는 무관한 채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던져진 존재”로서 생을 시작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왜 자기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릅니다. 인생살이는 모두 내 손에 있는 것 같아도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모두 충족시키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열심히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린 시절에 가졌던 포부대로 지금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우리의 인생은 이미 어린 시절의 꿈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혼은 스스로 선택하여 했을지 몰라도 결혼 생활은 처녀 총각 때의 환상과는 아주 동떨어진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이 이와 비슷하게 엮어지는 것입니다. 시곗바늘을 돌려놓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인생입니다. “다시 내가 20년만 젊어질 수 있다면, 다시 내가 태어난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주소입니다. 자동차는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다시 돌아 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길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돈을 다 벌었는데 명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후회하게 됩니다. 명예를 잃어버리고 돈만 남았다면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밥을 굶어가며 공부할 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공부는 마쳤는데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공부보다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있는 정성 없는 정성으로 아이를 키울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 키운 자식이 속을 썩이기 시작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때 생각하게 됩니다. “저 녀석이 어렸을 때 교육을 좀 잘 시켰어야 하는데...”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는 후회스러운 과거와 함께 “이것이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하는 동안에 어느덧 세월이 흘러 30대가 되고 40대가 되고 50, 60대가 되어 황혼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살아지는 피동적 삶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를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가를 모른 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체념하며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후회스러운 삶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불안과 공포, 걱정, 근심의 최종적인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죽음에 있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그 사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무시하고 싶고 가장 초연하고 싶은 한 가지 사실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우리에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좀 더 모으고 싶고 좀 더 부자가 되고 싶고 좀 더 쌓아 놓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의 재물이 내게 없을 때는 근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발짝만 떨어져서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재물에 대한 근심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쌓아놓고 살면 얼마나 누리고 갈 것입니까? 재벌 총수도 세끼 밥을 먹지 네끼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졌다는 과시욕을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자랑이나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는 명예나 권력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 이 명예욕과 권력에 대한 집착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굽실거려야 되고, 상좌에 앉아야 하고, 칭찬을 받아야 하고, 이름이 나야 하고, 누가 알아줘야 기분이 좋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서 생각해 보면 명예란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권력은 얻기도 힘들지만 지키는데 더 많은 스트레스를 동반합니다. 사람은 이름이 나면 날수록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집니다. 차라리 무명으로 사는 것이 편하지 않습니까? 무명으로 사는 것이 자유롭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아쉬워할 수도 있지만,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서 생각하면, 명예나 권력은 욕심을 내어 쟁취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기에 극복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또 쾌락에 대한 욕망도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그까짓 것 아닙니까? 극복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즐거우면 얼마나 즐겁고 쾌락을 누리면 얼마나 누리겠습니까? 다 썩어질 육신이요 쇠약해질 고깃덩어리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쾌락에 대한 욕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마지막 공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것은 삶이 다할 때까지 우리를 얽어매는 마귀의 올무인 것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초월하거나 죽는다는 사실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소유가 있건 없건, 명예가 있건 없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라는 사람은 자살 예찬론자였습니다. “자살하여라, 자살하여라. 자살은 너의 영혼을 편안하게 안식처로 인도해 줄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쇼펜하우어 말에 따라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던 베를린 지역에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콜레라가 무서워서 친구인 철학자 헤겔과 더불어 런던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콜레라균이 다 없어진 다음에 헤겔은 다시 돌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무서워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오랫동안 살다가 80이 넘어서 죽었습니다.
자살 예찬론자가 왜 전염병을 피합니까? 그는 말뿐이었습니다. 누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도 일 초에 두 명 이상이 지구상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해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죽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거기에 평안함이 있고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우리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부활 신앙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몇십 년 더 살고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도 가고, 너도 가고, 모두 가는 죽음의 길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종적인 안식입니다.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육적인 죽음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하나님이 품에 안으시고, 영원한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영원한 세계로 가는 하늘 문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믿는 자가 다른 세계를 맛보는 것입니다. 죽음은 육신에 속한 우리가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나그네 생활에 완성이요 성공이요 결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 감사할 수 있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구약학자였던 김정준 박사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유언하셨습니다. “내 묘비에 아무 다른 말 쓰지 말고 단지 한마디만 써다오. 임마누엘, 그것만 써다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는 웃는 낯으로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사명감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섭리하셔서 만세 전에 예정하신 존재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출생부터 다시 한번 신앙으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계신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밥만 먹고 돈만 벌고 명예를 누리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건강하다면 그 건강을 가지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재물이 있다면 그 재물을 가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여 하늘의 보화를 쌓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명예와 권력과 지식이 있다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과 처지를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어야 죽음의 권세를 극복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공상과학 소설이 아닙니다. 바로 육체로 부활하는 것을 그대로 시인하고, 역사적인 부활을 그대로 인정하고, 마음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미화해서 의미론적인 해석만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부활을 시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입니까? 부활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풀리지 않는 신비입니다. 그 신비로운 부활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아멘하며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앞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 사랑하는 제자 한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 어머니가 아들의 영정 앞에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녀석아 니가 애미한테 이렇게 못된 짓을 할려고 평소에 그렇게 착했었니?” 울며 통곡하는 소리가 지금도 들립니다. 그 어머니는 권사님이었습니다. 젊은 아들을 먼저 보낸 것입니다. 집안이 어려워서 사 남매 중에 유일하게 대학 공부를 시킨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저를 감동하게 했습니다. “아들아, 하나님 나라에 가서 다시 보자.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곧 따라갈게.” 이것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냈습니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간직해야 이 부활의 아침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삶이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괴롭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실 영광스러운 부활을 고대하고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삽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우리 모두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허망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오늘 이 아침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질문인 줄 압니다. 당신에게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질문에 여러분 아멘으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대역전극이 펼쳐지면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사건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영원한 희망이 부활 사건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죽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아 꽃이 피고 열매 맺듯이, 암흑에서 광명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다시 이어지는 극적인 환희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옛 제자들이 그 현장을 똑똑히 여러 번 목격하고 전한 복음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함께 만나 보았습니다. 체험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고 현장을 목격하기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도, 베드로도, 요한도, 엠마오의 제자들도 모두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도마는 믿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예수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과 한 번의 만남, 단 한 번의 만남이 이들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용감한 부활의 증인들로 만들었습니다. 우울증에 빠져 낙심하던 마음이 희망으로 가득 차서 보는 사람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 중에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으로서 이제 주님의 부활을 전하며 사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며 침묵으로 결단의 기도를 각자 드려봅시다.
주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자로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항상 부활의 에너지로 충만하여서 이 나그네 같은 세상에서 언제나 승리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위로하실 날을 소망하며 고대하며 살게 도와주옵소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아멘으로 대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