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하이힐’ 이매리 작가 베니스 초대전

입력 2022-04-14 16:22 수정 2022-04-15 11:37

‘황홀한 오케스트라 연주 속에서 하늘을 고요하게 나는 새. 고딕 건물 꼭대기 시계탑을 두드리는 청동의 사람 모형.’

이탈리아 수상 도시 베네치아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면 산 마르코 대성당이 들어선 ‘산 마르코 광장’의 낭만적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18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 베네치아는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인류의 보물창고다.

르네상스 유럽의 가장 부유한 도시 베니스를 무대로 한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듯 영문 이름 베니스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서 1895년부터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는 광주비엔날레의 실질적 모태다.

베니스비엔날레 100주년이던 1995년 마지막 관선 단체장이던 강운태 당시 광주광역시장은 격년제로 열리는 세계적인 이 미술축제를 본떠 광주비엔날레를 창설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100년 하고도 4반세기를 넘는 역사를 가진 베니스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현주소와 함께 작가들의 극명한 우열을 드러내는 각축장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술의 도시 베니스에서 특정 작가가 개인전, 그것도 초대전 기회를 얻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전남 강진 출신이자 광주대 초빙교수로 그동안 후배들을 길러온 이매리(1963년생) 작가가 15일 새벽 코로나19 와중에도 출국하는 이유는 베니스 개인전을 열기 위해서다. 세계 미술인들이 너나없이 꿈꾸는 베니스 개인전이 실현된 것이다.

이 작가는 베니스 에밀리 하비 재단의 소속 갈레리아 산 폴로(Galleria San Polo, 산 폴로 387번지 I-30125)에서 오는 19일부터 6월 28일까지 ‘이매리: 제네시스(GENESIS·창세기)’ 초대전을 개최한다.


베니스비엔날레 기간(4월23일~11월27일)에 맞춰 선보이는 그의 초대전은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국제적인 큐레이터 탈리아 브라초포울로스가 기획했다. 이후 2019년 재단에 이매리 초대전을 제안했고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지난해 말 어렵사리 일정이 잡혔다.

강렬한 색상으로 단장한 ‘빨간 하이힐’의 작가로 유명해진 이 작가는 베니스 입성을 위해 그동안 나름대로 동분서주해왔다. 2015년 중국 히말라야뮤지엄 초청으로 파빌리온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13인의 작가 중 한 명에 머물렀다는 후회가 남았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그의 예술세계를 줄곧 지켜봐 온 큐레이터 탈리아 브라초포울로스가 기꺼이 디딤돌 역할을 맡아 개인 초대전이 성사됐다.

이 작가는 베니스 초대전에서 인류 역사와 인간의 발전 과정을 존재론적 시각에서 다룬 36점의 다양한 작품을 전시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여러 인종의 흥망성쇠와 국가의 설립, 패망에 이르기까지 그가 고민해온 내면적 주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영어와 라틴어, 히브리어 등 여러 종교서적에서 발췌한 ‘창세기’ 구절이 24K금을 물감 삼아 화폭에 담겼다. 그는 창세기 구절이 인류사의 괘도를 기록한 공간이자 진화하는 인간의 존재와 집단적 기억을 보전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창구라고 여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지구촌에서 지금까지 벌어진 숱한 제국의 탄생과 집단 학살, 이주, 권력의 변화무쌍함을 이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적 렌즈를 통해 작품으로 그려낸다.

그는 초대전 개막식에서 여러 나라의 시 읽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질 전시장 벽면에 금으로 텍스트를 직접 쓰는 퍼포먼스를 직접 진행한다. 이에 따라 초대전은 소리, 회화, 조각, 시간 예술, 건축을 결합한 다원적 예술 공간으로 꾸며진다.

조선대 미술학 박사인 이 작가는 2000년대부터 뉴욕과 베이징, 독일, 일본, 불가리아 등에서 개인전 등을 통해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그리스 크레타 국립미술관,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미술관 등이 현재 소장 중이다.

이매리 작가는 “인생은 어쩌면 인간 본성과 사물의 본질을 찾는 험난하고 장구한 과정이자 짧은 여행일지 모른다”며 “작품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내면의 평화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