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토끼’ 부커상 후보 지명은 한국 장르문학의 힘 보여준 것”

입력 2022-04-14 15:53 수정 2022-04-14 16:39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오른쪽)와 번역가 안톤 허가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나란히 서있다. 뉴시스

“‘저주 토끼’의 부커상 노미네이션은 우리나라 장르문학의 문학성에 대한 증거인 것 같다.”

한국문학 전문 번역가 안톤 허(본명 허정범·41)는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자신이 번역한 정보라(46) 작가의 SF 소설집 ‘저주 토끼’가 부커상 후보작이 된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간담회에 동석한 정보라도 “한국에 저 말고도 SF 작가들이 많다. 배명훈 김초엽 정세랑 등은 이미 많이 알려졌고, 이산화 황모과 심너울 같은 작가들은 기대가 되는 분들이다”라며 “앞으로 더 많은 SF 작가들이 (세계 문학시장에서)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주 토끼’는 지난해 여름 영국에서 출간됐고, 올해 세계 3대 문학상에 드는 영국 부커상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에 뽑혔다. 한국 작가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것은 한강(2016년 수상), 황석영에 이어 세 번째지만 한국 장르문학이 부커상 후보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르문학은 SF, 미스터리, 판타지 등을 포괄하는 장르다.

부커상 최종 후보 발표를 계기로 마련된 이날 간담회에서 안톤 허는 “그동안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은 중년 남성 소설가들 위주, 특정한 기성세대 문학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면서 “나는 같은 작가들만 계속 해외로 내보내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한국에는 여성 문학이 풍부하고, 장르문학이 풍부하고, SF도 풍부하다. 이런 새로운 문학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경숙 박상영 등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온 안톤 허는 2017년 국내 출간된 ‘저주 토끼’를 보자마자 번역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첫 문장을 읽었을 때 이미 문체가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정보라는 아이러니가 많은 문장을 쓴다.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럽고 또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여러 정서가 깃들어 있다. 게다가 이야기가 굉장히 참신했다.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데, 누가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겠나. 너무 재미있다. 영미권에서 굉장히 잘 읽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보라는 “별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쓴 소설들인데 부커 재단이 높게 평가해줘서 감동했다”면서 “일상 속 장면이나 사물, 인물에서 출발해서 거기서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다만 이야기를 최대한 비현실적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보라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됐느냐는 질문에 “대학 시절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 이야기인 ‘머리’를 써서 연세문학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쓰기 시작했다”며 “그동안 제가 주목받는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맘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고 답했다. 그는 러시아·슬라브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난해까지 10년 넘게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했다. 그는 “슬라브 문학의 자유로움과 환상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서 “특히 1920년대와 30년대 소비에트 공산주의 문학이 꽃피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엉뚱한 발상과 자유로운 문체가 너무 좋았다”고 덧붙였다.

정보라는 6월에 페미니즘 소설집 ‘여자들의 왕’(가제)과 8월에 환상공포 경장편 ‘호’(가제)를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쓰고 싶은 얘기는 굉장히 많다”며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 고통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다”고 밝혔다.

안톤 허는 정보라의 다른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와 장편소설 ‘붉은 칼’ 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붉은 칼’은 스토리가 굉장히 재미있는 장편 SF이고, ‘그녀를 만나다’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과학을 덧입힌 소설집”이라며 “두 권 다 외국 독자들이 너무 좋아할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부커상 수상자는 다음달 26일 발표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