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핸들처럼 생긴 철제 원형 손잡이를 시계 방향으로 비틀어 당기자 육중한 잿빛 방폭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두께 2.5㎝ 강철판과 0.6㎝ 철판 사이에 방사선 차단 용도로 10㎝ 두께 콘크리트를 채워 넣어 3중으로 만든 문이었다. 이 문은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15kt(킬로톤)짜리 원자폭탄이 1㎞ 앞에 떨어져도 피폭을 견뎌낸다고 이태구 세명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설명했다.
1억짜리 벙커 들어가 보니
충북 제천 의림지 인근 야산에 지어진 이 방공호는 이 교수가 지하 대피공간 관련 연구를 위해 지난해 교육부 지원을 받아 만든 실물 모형이다. 방공호는 두께 40㎝짜리 철근콘크리트 외벽으로 감쌌다. 콘크리트 안쪽 철근은 끊어지지 않도록 U자형으로 꼬았다. 일반 건축물의 2배를 넣었다. 벽을 직접 두드려보니 거대한 바위를 친 것처럼 손만 아팠다. 철근콘크리트 외벽은 퉁 소리도, 탁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이 단단했다.
실내 면적은 20.25㎡(6.13평). 최대 12명이 1인당 1.69㎡를 확보할 수 있다.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최소 14일, 최대 한 달이다. 벽면 한쪽에는 방사능 오염물질을 걸러낼 수 있는 환기 필터, 하루 2ℓ씩 생수를 공급할 수 있는 물탱크, 간이 화장실 등을 설치할 수 있도록 배관이 들어가 있었다. 전력은 외부에 설치한 태양열 발전시설로부터 영구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방공호 안에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작은 대피 공간이 하나 더 있었다. 방폭문이 파괴되면 이곳으로 숨는다. 여기에도 따로 방폭문이 달려 있다. 내부는 약 4㎡(1.2평)로 본 공간의 5분의 1 크기다. 천장에는 비상시 지상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강철판으로 된 여닫이문이 설치돼 있었다.
이 방공호는 1억원짜리다. 골조 공사와 설비 구매에 5000만원씩 들었다. 이 교수는 모형 방공호를 핵무기, 생물무기, 원전사고 등 특수 재난 위험에 대비한 지하 대피소 연구에 사용했다.
“안전 불감증이 너무 심해요. 민방위 대피소는 실제 핵 물질이나 가스가 들어올 가능성은 없는지 테스트해봐야 하는데 안 해요. 공공용 대피시설 중엔 핵폭발에 대비할 수 있는 1등급 대피소도 거의 없고요. 북한에 핵탄두가 20~60개 있다는데 우리는 대비를 개인이 해야 하는 거예요. 정말 전쟁이 나면 난리가 날 거예요, 난리가.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중국이 우리나라 서해 쪽으로 2060년까지 원전 150개를 짓는다는데 그런 거 하나 터지기라도 하면 ….”
개인 벙커 짓는 부자들
부호들은 자기 돈으로 자택 지하에 이런 방공호를 설치하고 있다. 나라가 지정한 민방위 대피소는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고 생각해 스스로 대비하는 셈이다. 관련 업체들은 북한의 도발 등 전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방공호 설치 문의가 증가한다고 전했다. 감염병 확산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에 방공호를 사들이는 부자가 늘었다는 얘기가 외국 사례만은 아닌 것이다.
A업체는 방사능·독가스를 차단할 수 있는 공기정화시설과 전자기파(EMP) 차단 방폭 밸브, 자가발전시설 등을 갖춘 핵 방공호를 수입·판매하고 시공까지 한다. 업체는 군부대에 납품하는 수준의 방공호를 개인주택에도 설치해준다고 홍보한다. 수입 방공호는 이스라엘 제품이다. 부품을 들여온 뒤 조립해 땅에 매설하는 방식으로 시공한다. 비용은 웬만큼 잘 지으면 1억원을 쉽게 넘어간다.
A업체 대표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핵전쟁이 나도 안에서 완벽하게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라며 “돈이 많이 들고 토지도 있어야 해서 여유 있는 분들이 많이 설치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방폭문 설치를 의뢰한 B업체 대표는 전국 각지 개인주택에 설치한 방공호만 10곳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연평도 포격사건 등 안보 이슈가 터질 때마다 크게 사업하시는 분들 주택에 시공을 많이 했다”며 “방폭문 한 짝에 1000만원이 넘고 방공호 (전체) 시공은 1억~3억원은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고급 빌라엔 지하벙커가 있다
공동주택에 방공호가 설치된 사례도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소유했던 것으로 유명한 서울 서초동 고급 빌라 트라움하우스는 지하 방공호를 갖춘 최초의 공동주택이다. 외식사업가 백종원씨 등도 이곳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공호 면적은 트라움하우스 3차가 66㎡, 5차는 132㎡다. 두 곳을 합치면 최대 200명이 2개월까지 대피할 수 있다.
트라움하우스 방공호는 고무와 철판을 번갈아 쌓아 올린 특수장치를 지표면에 설치하는 면진공법을 적용했다. 아파트 등 대규모 건물이 무너지는 리히터 규모 7 이상의 강진에도 견딘다. 또 까다로운 스위스 민방위 규정에 준해 방폭문과 공기정화시설, 비상발전시설 등을 갖췄다. 또 다른 강남 고급 아파트인 상지리츠빌카일룸에도 방공호가 있다. 이곳은 분양 때부터 방공호를 마케팅 포인트로 앞세웠다.
지금 이들 주택은 공급면적 300㎡대 기준으로 70억~80억원을 줘야 가질 수 있다. ‘럭셔리(초호화) 매물’만 취급한다는 부동산 업체에 전화로 구매를 문의했다. 중개업자는 “워낙 고가 매물이다 보니 구매하려면 문의할 때부터 본인 현금 규모와 명함 등을 먼저 제시하는 게 기본”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지금 어느 동네 사느냐”고 물었다. 살 돈이나 있느냐는 투였다.
전쟁 나면 생사는 돈으로 갈린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1986년 출간한 저서 ‘위험사회’에서 “부(富)에는 차별이 있지만 스모그에는 차별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위험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의미지만 현실에서는 동일하게 맞게 될 그 위험을 누구는 피하고 누구는 못 피하느냐가 ‘돈’으로 갈릴 가능성이 크다. 자기 집 지하에 준비된 전용 방공시설로 숨을 수 있는 사람과 입구가 뻥 뚫린 지하 주차장을 방공시설로 삼아야 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 생사를 가르는 벽이 있게 마련이다.
이재은 충북대 국가위기관리소장은 “본인 안전은 스스로 책임져야겠지만 대피소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며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 안전을 지키는 건 국가의 책무인 만큼 정부가 새롭게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환 용인대 경호학과 교수도 “미사일이나 장사정포가 날아오면 결국 시민이 피해를 본다”며 “우리도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시범적으로 서울 송파구민회관 지하 강당을 화생방 방호시설로 수리하는 테스트를 했는데 비용도 얼마 안 들었다”고 덧붙였다.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강당을 수리하는 데에는 1억2000만원이 들어갔다.
이슈&탐사팀 강창욱 이동환 정진영 박장군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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