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인 이양희(65) 국제아동인권센터 이사장은 2003년부터 10년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7년 위원장으로 선출돼 한국인 최초로 유엔 인권 기구의 최고 책임자를 지냈다. 2014~2020년에는 유엔 인권이사회 미얀마 특별보고관을 역임했다. 한국인이 특별보고관이 된 것 역시 처음이었다.
이 이사장이 국제기구에서 활약하는 대표적인 여성 전문가가 된 데에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1970년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었던 이철승 7선 의원이고, 어머니 김창희 여사는 소아과 의사였다.
“부모님은 아들딸 차별 없이 오빠와 저를 키우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적인 결정을 하실 때 꼭 제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대학 1학년 때 미국에서 받았던 소포가 떠올라요. 작고 묵직한 소포에는 한복 자락을 뜯어 만든 주머니에 집 앞마당의 흙이 담겨 있었어요. ‘너는 대한민국의 딸이다. 잊지 말아라’는 편지와 함께요. 참 부담스러운 말씀이었는데 그게 저를 지키고 일으켜 세웠던 것 같아요.”
그는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망명길에 오른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 미국 생활을 했다. 어머니가 의사 보조원으로 취업해 가족을 부양했고 흑인 빈민가에서 흑인 학교를 다녔다. 차별받던 흑인들이 이방인인 그들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줬고, 그에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아동인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면서였다. 학대받는 장애아동에 주목하면서 아동학대예방협회 일을 하게 됐고, 그게 아동인권으로 이어졌다.
이 이사장의 유엔 활동 뒤에는 아버지의 ‘큰 그림’이 있었다. 61년 유엔총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던 그가 ‘우리 딸이 여기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 언젠가 유엔에서 일하게 되면 프랑스어가 꼭 필요하다고 전공을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가 74년이에요. 한국이 유엔에 가입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때였는데, 30년 후 제가 유엔에서 불어를 쓰며 일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버지는 제가 특별보고관일 때 돌아가셨는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시면 ‘왜 미얀마에 안 가고 여기 있니, 나는 괜찮아’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게 끝까지 제 일을 지지해주셨어요.”
권혜숙 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