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계 이선영-한정석 콤비, ‘쇼맨’으로 3연타석 홈런 치나

입력 2022-04-13 05:00
한정석(왼쪽)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는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레드북’을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세 번째 작품인 ‘쇼맨-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도 개막 직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권현구 기자

83년생 동갑내기인 이선영 작곡가-한정석 작가는 데뷔 이후 발표한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레드북’을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시키는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특히 두 번째 작품인 ‘레드북’은 남성 서사 중심이었던 국내 뮤지컬계에 여성 서사 붐의 계기를 만드는 장외 홈런이 됐다. 지난 1일 국립정동극장에서 개막한 세 번째 작품 ‘쇼맨-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5월 15일까지·박소영 연출)가 3연타석 홈런이 될 조짐을 보인다. 지난 6일 국립정동극장에서 이 작곡가와 한 작가를 만나 이번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쇼맨’은 두 콤비의 색깔이 많이 드러난 작품

“몇 년 전에 김민섭 작가의 ‘대리사회-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한 개인이 사회 안에서 온전히 주체적일 수 없다는 자각이야말로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공연에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SNS에서 히틀러가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연설 연습을 하는 등 쇼맨십에 관심이 많았다는 자료를 접한 것도 이번 작품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재자를 떠받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독재자 우상화가 깨졌을 때의 반응 등에 호기심이 생겼거든요. 3년 전 정동극장에서 신작 의뢰를 받은 이후 여러 생각이 모이면서 이번 작품으로 구성됐습니다. ”(한정석)

‘쇼맨’은 냉소적인 한국계 입양아 수아가 젊은 시절 독재자의 대역배우를 했던 네불라의 화보 촬영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두 사람 모두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것이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이라 여기며 살았던 쇼맨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동안 자신의 허물을 인식하는 한편 상대방에게 길잡이가 되어준다.

지난 1일 국립정동극장에서 개막한 세 번째 작품 ‘쇼맨-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의 한 장면. 국립정동극장

“정동극장이 작품을 의뢰하면서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그래서 앞선 작품들과 달리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2년 전 시놉시스를 완성한 후 선영 씨와 계속 토론하며 ‘고치고쓰고’를 반복하다보니 주제의식이 뚜렷해진 것 같아요.”(한정석)
“2013년 초연한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2017년 초연한 ‘레드북’이 여러 뮤지컬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디벨로핑하는 단계를 거쳐 본공연을 올린 만큼 관객의 피드백을 일부 반영했다면 이번 작품은 그런 과정 없이 바로 본공연을 올렸기 때문에 개막 전까지 긴장이 많이 됐습니다. 앞선 두 작품보다 우리 색깔을 많이 드러냈는데, 다행히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입니다.”(이선영)

2008년 뮤지컬 아카데미에서 만나 협업

이 작곡가와 한 작가는 2008년 뮤지컬 아카데미 ‘불과 얼음’에서 만났다. 당시만 해도 대학 커리큘럼에 뮤지컬 창작 수업이 손에 꼽을 때라 뮤지컬에 관심 있던 창작자들이 이 아카데미에 많이 모였다. 매주 창작자 파트너를 바꿔 실습하는 수업에서 친해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뮤지컬에 도전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작품이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남북한 군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여신님이 보고 계셔’다. 이어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기준에서 야한 소설을 쓰는 작가 안나와 고지식한 변호사 브라운이 티격태격하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은 ‘레드북’이 나왔다. 각각 전쟁과 페미니즘이라는 심각한 소재가 무겁지 않으면서도 코믹하게 그려져 호평을 받았다. 특히 ‘레드북’은 그동안 국내 뮤지컬계에서 보기 어려웠던 용감하고 진보적인 여성상을 그려내 찬사를 받았다. 현재 영국에서 선보이기 위한 각색 작업이 진행 중인 이 작품은 빠르면 올해 안에 영국 배우들로 리딩 공연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선영 작곡가와 한정석 작가 콤비가 선보인 ‘여신님이 보고 계셔’(위)와 ‘레드북’의 한 장면. 연우무대·아떼오드

“선영 씨는 제게 최고의 파트너입니다. 늦은 시간에도 언제든 전화해서 작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우리가 동료이기 전에 친구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협업을 시작한 직후엔 서로 티격태격도 했지만 지금은 정말 잘 맞게 됐습니다.”(한정석)
“정석 씨와 저는 이제 생사를 같이하는 전우라고 생각해요. 제가 비관적인 데 비해 정석 씨는 낙관적인 성격이 힘든 작업 과정 속에서 서로를 보완해 주는 것 같아요.”(이선영)

한 작가는 지난해 ‘레드북’으로 극작가들에게 최고 영예인 차범석 희곡상 뮤지컬 부문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나서 그가 한 행동은 상금을 이 작곡가와 나누는 것이었다. 한 작가는 “뮤지컬 대본은 작곡가와 따로 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영 씨와 수상의 영광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출가 박소영과 함께 뮤지컬계에 돌풍

두 사람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동료가 있다. 바로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2021년 대극장 버전)에 이어 ‘쇼맨’의 연출을 맡은 박소영이다. 두 사람과 박소영은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뒤 지금까지 협업하고 있다. 이 작곡가의 경우 박 연출가와 아예 같은 작업실을 쓰고 있다.

이선영 작곡가와 한정석 작가가 늘 협업하는 박소영 연출가. 국립정동극장

“소영 누나는 배우나 스태프와의 팀워크가 좋은 연출가에요. 창작자이자 현장 스태프로서 치열한 소영 누나와 선영 씨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뮤지컬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한정석)

이 작곡가는 박 연출가 그리고 장우성 작가와 함께 또 다른 트리오로도 활동 중이다. 바로 2017년부터 ‘선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귀감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어문자료를 토대로 음악극을 만드는 ‘목소리 프로젝트’다. 그동안 전태일을 소재로 한 ‘태일’과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한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렛 수녀의 삶을 그린 ‘섬:1933~2019’을 선보인 바 있다.

“2016년 11월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에 소영 언니랑 나갔다가 가수 양희은 씨의 노래를 들었어요. 단순한 선율에 진솔한 가사의 노래를 많은 사람이 따라 부르는 데서 큰 감동을 느꼈고, 이런 스타일의 음악극을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상업적인 뮤지컬 제작 시스템에서 벗어나 마음 맞는 사람끼리 뭉친 게 ‘목소리 프로젝트’입니다. 정석 씨와 함께 하는 작업이 드라마로서 높은 완성도를 지향한다면 장우성 작가와의 작업은 실존 인물인 캐릭터에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이선영)

이 작곡가와 한 작가는 현재 네 번째 작품으로 인간보다 먼저 우주여행을 했던 동물인 개 라이카에서 모티브를 얻은 ‘라이카 in B612’를 작업 중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연극·창작뮤지컬 대본공모 사업에 선정됐다. 한 작가는 “원래 ‘쇼맨’보다 ‘라이카 in B612’의 작업을 먼저 했었다”며 “대본 수정 작업과 함께 선영 씨의 음악이 더해지면서 현재 약 3/4 정도 만들어진 상태”라고 귀띔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