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K는 무기력하고 우울하여 공부를 할 수가 없다. 부모는 딸이 생각이 없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핀잔을 주고, 야단치지만 사실 K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지만 온갖 상념들로 머릿 속이 꽉 찼다. ‘좋은 대학에 못가면 내 인생이 완전 망하는데’ ‘이번 중간고사에서도 시험을 망치면 어떻게 하나?’ ‘1학년 때 만이라도 공부를 시작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텐데’ ‘친구들은 다 대학가고 나만 못 가면 어쩌지’등이다.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빠져들어 침대에서 나올 수가 없다. 사람은 하루에 7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며 그중 80%가 불필요한 생각이라고 한다. 또 후회, 걱정, 자책 등등....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는 생각이 더 많아지고, 부정적으로 된다. 이와 같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현상을 ‘반추’라고 한다. 반추는 불안을 회피하고 통제하려는 무모한 도전이다.
먼저 K가 느끼는 자책, 후회 등의 생각과 우울한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알아차리기 힘들다면 부모가 그 마음을 읽어준다. 그리고 K의 말하는 행간에서 아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빈둥거리며 누워만 있지만 K 입장에선 ‘학업적인 성취’를 하는 것이 ‘가치’ 였던 거다. 세상이 알아줘서도 아니고, 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아닌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다. 순간 순간의 행동이나 선택이 내가 원하는 가치에 다가가는 행동인지 아니면 K처럼 지금 우울함이나 걱정되는 마음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행동인지를 알아차리고 선택하게 해보자.
그러러면 우선 과거에 머물러 후회하는 것도, 미래를 앞당겨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것도 아닌 ‘현재’를 사는 것이 필요하다. 또 가치에 다가가는 행동을 순간 순간 선택하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다. 지금 당장의 안락함이나 편안함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마음 속에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에 다가가는 행동에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의 통행료’를 지불할 필요가 있다.
K : 저도 정말 공부를 미루고 누워만 있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요. 다음 주가 시험이예요. 근데 그게 마음대로 안되요!
치료자: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행동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바라나요?
K : 저는 그냥 마음이 편해져 공부 할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치료자 : 그렇게 하는 것을 막는 건 무엇인가요?
K : 정말 솔직하게 말한다면, 공부는 너무 힘들어요. 또 잘되리란 보장도 없구요,. 너무 늦은 거 같아요..... 그래서 공부는 저에게 항상 부담되는 문제에요.
치료자 : 글쎄요. K의 ‘마음’은 스스로에게 부담을 건네는군요.
K : 저는 그런 느낌이 달라지기를 기다려 왔어요. 그러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치료자 : K가 공부를 하기 위해 기꺼이 불편할 의향이 있는지가 관건이네요 .계속해서 그 선택에 직면하게 될 거예요. 우리는 모두 그래요. 그건 마치 중요한 것을 향해 운전하는데, 요금소가 나타나는 것과 같아요. 통행료로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편안함의 포기’예요. 지금은 통행료는 비싸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편안함을 포기할 의향이 있나요? 아니면 가만히 서 있거나 돌아가더라도 편안함을 택할 건가요?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에 가치 방향으로 향하는 데 필요한 통행료를 지불 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거다. 다행히도 이 특별한 요금소는 언제나 열려 있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