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어허, 어디 남녀가… 조선, 사랑이 꽃피다

입력 2022-04-07 00:05

어느덧 4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서울 여의도와 석촌호수 벚꽃길이 3년 만에 다시 개방됐다. 여의도 공원과 한강 둔치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연인들이 벚꽃길 아래서 사랑을 속삭인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조선에서는 어림 없는 일이었다. 강력한 유교 질서의 가부장 사회 아래 남녀의 만남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무엇보다 미혼 여성의 ‘연애’는 해서는 안 될 금기였다.


감시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었다. 조선 후기 화가 혜원 신윤복(1758~?)은 주로 남녀 간의 애정을 화폭에 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워 보였을까. 그림 속 인물들은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치켜 올라간 눈초리를 지녔다. 맵시와 멋이 넘친다. 신윤복의 그림 속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우물가에서[정변야화(井邊夜話)] 지본채색, 28.2 x 35.6 cm

보름달이 뜬 어느 초저녁, 여종으로 보이는 여인 둘이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우물가 오른쪽 담 위에 사방관을 쓴 양반이 이들을 훔쳐본다. 조선시대 우물은 동네 여인들이 모이는 곳이자 여성과 남성이 우연히 ‘합법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양반의 눈길이 음흉한 것으로 봐서 여인 중 한 사람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 여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손목[소년전홍(少年剪紅)] 지본담채, 24.2 x 31.5 cm

양반이 성공했다면 위와 같은 그림이 나올 수 있겠다. 춘색이 만연한 봄이다. 상투를 틀고 사방관을 쓴 그림 속 남자는 장가간 젊은 양반으로 보인다. 그가 후원에서 젊은 여종의 손목을 끌고 희롱하고 있다. 그림 속 괴석이 여인의 몸짓 모양과 비슷하게 그려졌다. 양반 뒤쪽에 보이는 돌담의 흙무더기는 어린 양반을 상징한다. 신윤복은 배경을 활용하여 그림 특유의 노골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곤 했다.

봄날[춘색만원(春色滿園)] 지본채색, 28.2 x 35.6 cm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앞치마를 두른 채 홀로 나물을 캐러 가는 것을 보면 여염집 여자다. 남자가 나물 바구니에 손을 대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니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하다. 양반인 남자는 무관들의 평상복인 철릭에 합죽선을 들고 있다.

“봄빛 뜨락에 가득 차니(春色滿園中)
은 흐드러지게 붉게 피었구나(花開爛漫紅)”

낮술로 빨개진 남자의 얼굴을 ‘꽃’으로 표현했다. 그림 속 초가지붕 위로 소나무 가지가 드리워졌다. 툭 튀어나온 초가지붕은 남성을, 그 위 소나무 가지는 여성을 상징한다.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남녀 간 춘정이 무르익어 가는 모습을 표현한 혜원의 솜씨다.

밀회[월하정인(月下情人)] 지본채색, 28.2 x 35.6cm

한 연인이 초승달이 뜬 밤에 몰래 만났다. 넓은 갓에 중치막을 입은 남자는 젊은 양반이다. 연인을 오랜만에 만나 답답한 남자는 마음을 달래 보려는 듯 품속을 더듬어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여자는 쓰개치마를 쓰고 끝동이 달린 저고리를 입고 있다. 신발이 갖신(가죽신)인 것으로 보아 꽤 사는 집안의 여성으로 보인다.

“달빛 침침한 삼경(月沈沈 夜三更)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兩人心事兩人知)”

그림의 화제는 때가 삼경(밤 11시~새벽 1시)임을 알려준다. ‘남녀칠세부동석’, 남녀 접촉의 기회를 봉쇄했던 사회의 틀을 깨고 야간 통금시간에 은밀하게 만났다. 통금이 아니더라도 조선시대 양반 여성들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 질서와 익명의 공간 부재 때문에 조선에서의 자유연애는 거의 불가능했다. 내외법으로 젊은 남녀의 접촉을 막아 여성의 성적 욕망이 싹틀 기회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민간에서 남녀가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은 빨래터였지만, 양반에게는 어떠한 공간도 허용되지 않았다.

삼각관계[월야밀회(月夜密會)] 지본채색, 28.2 x 35.6cm

이 그림 또한 한밤중 남녀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여자는 민간의 부녀자이며 남자는 옷차림과 지휘봉 비슷한 방망이를 든 것으로 보아 포도청 소속 포교로 추정된다. 벽에 붙어 지켜보고 있는 여성은 양반 같다. 가깝게 붙어있는 두 남녀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은 이전에 없었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복잡한 애정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색다른 그림이다.

<밀회>와 <삼각관계>의 시간은 조선시대 한양의 밤이다. 조선의 연인들은 오로지 어둠과 정적 속에서만 비밀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사회에서 젊은 남녀의 만남은 ‘정상적’ 혹은 ‘합법적’ 관계가 아닌,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배규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