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볼쇼이 발레단을 그만둔 러시아 발레리나와 전쟁을 피해 고국을 탈출한 우크라이나 발레리나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함께 춤추며 평화를 호소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이 공연에 대해 현지 우크라이나인들은 아직 전쟁 중인 양국 무용수들이 한 무대에 서서는 안 된다며 시위를 벌였다.
‘라 레푸블리카’ 등 이탈리아 언론에 따르면 4일(현지시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지-평화를 위한 발레’ 공연이 열렸다. 우크라이나 적십자사를 돕기 위한 이번 자선공연에는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무용수가 26명 참가했는데, 러시아인 5명과 우크라이나인 9명이 포함됐다. 올가 스미르노바, 마리아 야코블레바 등 러시아인 무용수들은 모두 서방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이었다.
이날 공연에 참석한 무용수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러시아 출신의 올가 스미르노바. 볼쇼이 발레단 스타 무용수였던 스미르노바는 최근 “러시아가 부끄럽다”며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발표한 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이적했다. 스미르노바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솔리스트를 그만두고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 솔리스트로 합류한 브라질 출신 발레리노 빅터 카이세타와 함께 이날 듀엣을 선보였다.
스미르노바는 당초 오는 9일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리는 발레리나 카를라 프라치 타계 1주기 갈라 공연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이적 이후 첫 무대가 16일 ‘레이몬다’로 결정되자 연습을 위해 불참을 선언했다. 그런데, 파리오페라발레 수석무용수 출신으로 현재 산 카를로 극장의 발레 부문 예술감독인 알레시오 카르본이 자선공연을 전격 기획하자 출연하게 됐다. ‘레이몬다’의 본격적인 연습까지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미르노바가 볼쇼이 발레단을 떠난 후 서방에서 출연하는 첫 무대라는 점에서 이날 공연은 큰 주목을 받았다.
스미르노바는 마지막 리허설에 앞서 취재진에 “이런 상황에서 무대에 (우크라이나 무용수들과) 함께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우크라이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카르본 예술감독은 “올가는 러시아 정권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첫 번째 무용수라는 점에서 우리 공연에 강력한 힘을 불어 넣어줬다”며 스미르노바의 참여를 환영했다.
이번 공연에서 스미르노바와 함께 중심 역할을 한 무용수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오페라극장의 간판 발레리나로 활동해온 아나스타샤 구르스카야. 우크라이나를 겨우 탈출한 구르스카야는 “(전쟁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오늘 이 공연에 참여함으로써 내 춤으로 조국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공연은 평화 기원 및 자선 목적에도 불구하고 나폴리에 있던 우크라이나 공동체를 분노하게 했다. 러시아인 무용수들이 전쟁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번 무대에 서는 것이지만, 우크라이나 부차 등 여러 지역에서 러시아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알려진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같은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산 카를로 극장이 자선공연의 타이틀을 ‘평화를 위한 발레’로 처음에 정한 것도 우크라이나인에게는 러시아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에 막심 코발렌코는 나폴리 주재 우크라이나 영사는 산 카를로 극장 측에 공연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코발렌코 영사는 현지 언론에 “아직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어떤 협력도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우리가 공연을 멈출 수 없지만, 극장도 지금 상황에서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압박했다. 이에 대해 산 카를로 극장은 ‘우크라이나 지지-평화를 위한 발레’로 타이틀을 서둘러 바꾼 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번 공연은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계획됐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공연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에게는 러시아 무용수들과 같은 무대에 서지 말라는 협박 전화가 오기도 했다고 이탈리아 언론은 전했다. 또한,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산 카를로 극장 밖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시위가 열리기도 했지만, 무용수들은 긴장 속에서도 예정대로 공연을 진행했다.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은 무대에서 서로 포옹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카르본 발레 부문 예술감독은 “예술가들의 용기에 감사하고 싶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무용수들 모두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