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산울림은 1969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을 시작으로 한국 연극사의 중심에 있었던 현대연극의 산실이다. 1985년 3월 홍익대 인근에 개관한 소극장 산울림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2019년 극단 산울림 창단 50주년 기념으로 초연돼 호평받았던 연극 ‘앙상블’(7일부터 5월 8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이 3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작가 파비오 마라가 쓴 ‘앙상블’은 지적 장애가 있는 30대 아들 미켈라, 헌신적으로 아들을 돌보는 엄마 이사벨라 그리고 오빠에게만 관심을 쏟는 엄마 때문에 집을 나갔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딸 산드라의 갈등과 애증을 그렸다. 초연에 이어 재연도 극단 및 소극장 산울림의 예술감독인 임수현(57) 서울여대 교수가 번역하고 심재찬(69) 연출가가 연출했다. 두 사람을 지난달 31일 소극장 산울림에서 만났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놓고 다양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프랑스라는 작품 속 배경이 굳이 인식되지 않을 만큼 현재 한국과 이질감 없이 와 닿습니다.”(임수현)
극단 및 소극장 산울림을 만든 임영웅(86) 연출가와 오증자(87) 번역가의 아들인 임수현 감독은 프랑스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다양한 프랑스 현대 연극을 국내에 소개해 왔다. 지난해 연극계에서 큰 인기를 얻은 1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도 그가 번역한 것이다.
“연간 2~3편 정도의 프랑스 희곡을 번역합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엔 주로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많이 번역했다면 요즘에는 ‘앙상블’처럼 보편적인 주제를 다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에 끌립니다. 실제도 프랑스에서도 20세기엔 실험적인 희곡이 주목받았다면 21세기엔 공감 가는 내러티브를 담은 희곡이 많이 보입니다.”(임수현)
‘앙상블’은 2015년 프랑스 아비뇽 오프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후 2년 뒤 파리에서 재공연됐다. 극작가 마라는 연출과 함께 장애가 있는 아들 역을 직접 연기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2017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연극상인 몰리에르상의 여러 부문에 후보로 올라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이후 여러 나라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한국에선 극단 산울림 5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선보여졌다. 다만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극단 산울림의 50주년 프로그램이 잇따라 이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다.
“연극 ‘앙상블’을 올릴 때 연출가로는 심재찬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심 선생님은 저희 산울림의 정신적 지주시기 때문에 50주년 기념 신작 연출을 꼭 맡아 주셨으면 했습니다. 다행히 심 선생님도 바로 OK 하셨고요.”(임수현)
심재찬 연출가는 현재 대학로 연극인들의 맏형으로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계보를 이어 왔다. 국립극단이 지난 2020년 창단 70주년 기념작으로 준비한 사실주의 연극의 고전 ‘만선’(코로나19로 연기돼 2021년 공연)의 연출을 심 연출가에 맡긴 것도 이 때문이다. 젊은 시절 국내 1세대 연출가들의 조연출로 활동한 심 연출가는 2010년대 자신도 원로의 위치에 올라있지만, 건강이 나빠진 스승 임영웅 연출가를 대신해 ‘고도를 기다리며’ 리허설을 여러 차례 진행하거나 2014년 ‘챙!’의 공동연출을 맡기도 했다. ‘앙상블’은 심 연출가가 산울림에서 2008년 ‘방문자’ 이후 11년 만에 단독으로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극단 산울림 50주년이기도 했지만 ‘앙상블’ 대본을 읽었을 때 정서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았어요. 산울림은 창단 시절부터 프랑스 희곡을 많이 올렸는데, ‘앙상블’은 예전에 자주 접하던 프랑스 연극과 아주 달랐습니다. 전혀 관념적이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이었어요. 작가가 한국처럼 가족 중심 문화가 강한 이탈리아 출신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심재찬)
올해 ‘앙상블’ 공연에는 이자벨라, 미켈레, 산드라, 클로디아(교사) 역에 각각 배우 정경순, 유승락, 배보람, 한은주가 캐스팅됐다. 지난 2019년 초연과 비교해 이자벨라 역이 예수정에서 정경순으로 바뀌고 나머지는 동일하다.
“같은 작품이라도 배우가 바뀐 만큼 느낌이 많이 달라졌어요. 게다가 초연부터 참가한 스태프와 배우도 작품에 대한 고민이 숙성돼 이번 작품에 담겼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앙상블이 좀 더 성숙해진 거죠.”(심재찬)
한편 극단 및 소극장 산울림은 임수현 예술감독과 누나인 임수진 극장장이 연로한 임영웅-오증자 부부의 뒤를 이어 2011년부터 이끌고 있다. 2013년부터 고전을 젊은 예술가들의 시각으로 풀어내는 ‘산울림 고전극장’ 및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 불멸의 클래식 음악가들의 삶을 그들이 남긴 편지와 라이브 음악으로 재조명하는 ‘산울림 콘서트’ 그리고 2016년부터 연극뿐 아니라 국악, 인디밴드, 현대무용, 독립영화 등의 예술가들과 만드는 축제인 ‘판 페스티벌’은 남매가 기획해 자리 잡은 대표 레퍼토리다.
“부모님이 연로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저희 남매가 맡게 됐는데요. 부모님이 고집스럽게 해오던 것을 지키고 이어가는 게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저도 학자로만 살아오다가 현장에 발을 담그다 보니 신경 쓸 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산울림에 대한 향수를 가진 관객과 함께 젊은 관객을 새로 유입시킬 수 있게 노력해야죠.”(임수현)
산울림은 전통을 지켜가면서도 동시대성을 가진 극단 및 극장으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최근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SNS를 통한 홍보에도 나섰다.
“국내 연극계에서 그동안 수많은 소극장이 있었지만, 극단 혼자서 이렇게 오랫동안 소극장을 운영하는 것은 산울림이 이제 유일합니다. 산울림의 정체성은 단번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갑자기 바뀌어서는 안된다고 봐요. 산울림의 연극사적 성과를 재조명하면서 현재의 시점에서 새롭게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죠. 산울림의 존재 가치는 한국 연극계에서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까요.”(심재찬)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