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철 무대가 더 담백해졌다,
그동안 전인철 연출은 시대의 담론과 동시대 사회적 논쟁을 적극적으로 무대로 용해 시켜 오고 있다. 2006년 극단 ‘이와삼’의 <고요>로 데뷔한 이후 전인철을 무대로 각인시킨 작품은 김은성 작가의 작품 3부작 <시동라사>(2007), <순우삼촌>(2010), <목란언니>(2012)를 연출하면서부터다. 이 작품 시리즈를 통해 전인철은 무대를 채우고 비우며 작품들을 쏟아냈고, 극 중 인물 탈북 여성 ‘목란언니’는 고단한 남한 생활에도 한국 사회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탈북민’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노란봉투>(2017), <국부>(2017), <날아가 버린 새>(2019),<나는 살인자 입니다>(2019) 등을 연출해 오면서 동시대의 현상과 담론을 무대로 제시해 오고 있으며 <나는 살인자입니다>를 통해서 정치와 과학의 불안한 결합을 디스토피아 세상으로 그려낸 바 있다.
편견의 차이
전인철은 왜 이 작품에 그토록 애착을 가질까.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청소년들의 사회적 담론과 현상들을 무대로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걸까. 연출은 ‘퀴어와 십 대 노동자’라는 주제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2015년 이 작품을 무대에 처음 올렸을 때 당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낼 것 인지가 목표였습니다. 2018년 ‘미투’가 있었고 2020년에는 ‘코로나’가 시작되었습니다. 극단은 연출가와 배우들이 젠더, 여성, 노동, 소수자를 키워드로 스터디를 진행했습니다. 스터디 과정에서
이 작품을 단순히 재공연에 머물지 않고 스터디를 통해 동시대적인 청소년들의 사회적 현상과 담론으로 연결해 오고 있고 올해 공연에서는 극 중 인물 희주를 중심으로 ‘십 대 노동자’의 사회적 문제, ‘준호’를 통해서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의 ‘퀴어’의 사회적 담론으로 무대화 하려는 연출적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청소년극으로 출발한 작품을 대하는 신성한 의무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작품으로 투영하는 문제와 담론을 사회적 책임감으로 작품을 바라보면서 <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이 담아내고 있는 한국 사회 현상의 키워드를 포착해 다양한 시선으로 변화시켜 오면서 무대 표현 방식도 담백하게 변주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국사회의 십 대들의 성 소수자 문제를 들여다보자. 극 중 인물 준호(오해영 분) 레오타드를 즐겨 입는 취향(趣向)을 보이면서도 ‘커밍아웃’을 하거나 젠더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레오타드를 즐겨 입는 준호를 ‘십 대 성 소수자’와 ‘편견의 차이’ 일 뿐이라는 사회적 시선 중 극 중 인물은 자율적인 방식대로 읽히게 된다. 준호는 입시와 상위권 경쟁에서 치열한 생존 방식으로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려야 했고 준호의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는 것은 여성용 발레복 레오타드를 입으면서부터다.
희주와 대화에서 준호는 “(중략) 우리 누나가 레오타드를 입고 춤추는 거 보고 이거 입게 됐거든. 누나가 무용에 소질은 없어도 레오타드를 입고 춤출 때 제일 재밌어 했어. 엄마가 무용 그만두게 하고 딴 거 시킬 때 엄청 우울해 하고. 그때 누나가 이 레오타드를 입고 손짓 발짓 할 때 내 심장이(중략).”
줄곧 준호는 입시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모범생을 유지해 왔다. 심리적 불안과 정신적인 외상(外傷)으로써 입시 증후군을 보이는 준호에게 심리적 해방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레오타드를 입고 자유로운 춤을 추는 누나를 보면서 부터다. 누나의 우울성을 준호도 심리적인 동일화로 느끼고 있다. 불안함의 심리적 도피로 그 내면의 억압에서 탈출하기 위해 준호는 레오타드를 입게 되었다.
우선 레오타드는 누나의 자유로운 춤을 보며 무의식으로 존재해왔고 자유로운 욕망을 표출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준호를 사회적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준호가 유일하게 심리적 안정을 보이고 만족감을 드러내는 것은 레오타드를 즐겨 입고 몸을 드러내며 셀카를 찍을 때다. 희주는 준호를 향해 “레오타드는 원래 춤출 때 입는 옷이야(중략). 너 진짜 게이야?”라고 말하고 “(중략) 레오타드를 입고 땀 흘리면 다 벗고 레오타드만 입고 달리고 싶다고”라며 받아치며 준호는 자기 고백을 한다. 레오타드 입고 몸을 드러내며 셀카를 찍는 만족감을 드러내는 행동을 보이는 것에 십 대 성 소수자일 수 있다는 편견이 존재하고 준호 행동은 자유로운 취향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차이’를 보인다.
작품은 준호를 중심으로 인물의 젠더적 갈등과 여성성이 특정적인 정서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을 보이는 준호를 ‘남과 다른 사람’으로 분류해 셀카 주인공이 변태, 게이 등으로 성 소수자 추측을 하는 것은 민지와 태우, 희관 이다. 레오타드를 입은 남자 셀카 사진이 인스타로 퍼진 후 태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게 다 동성애 초기 단계야. 여자 옷 보면 막 흥분하고 여자 속옷을 입으면서 행복해 하는 애들 보면, 나중에 다 게이짓 하고 성전환하고 그렇대” 듣고 있던 준호는 “(중략) 취미일 수도 있잖아”라고 두 사람이 대화하는 극 중 장면이 있다. 준호 캐릭터 사이에 젠더의 전복성과 편견의 시선이 양가적으로 존재 할 수 있으며 성소수자적 초기행동으로써 다층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사회적 편견의 시선과 차이로써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퀴어축제’를 개최해 오는 한국 사회 십대들의 성 소수자 문제는 어떨까. 지난해 청소년 성 소수자 위기 지원센터 띵동이 5년간 상담 사례 2,055건을 분석한 결과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성 소수자들은 자신을 숨긴 채 남몰래 고통받고 있으며 성 소수자란 이유로 가족과 갈등이 생길 때 홀로서기 어려운 데다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청소년 성 소수자는 보호 받아야 할 학교와 가정에서 마저 차별과 혐오를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젠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십 대 성 소수자들이 증가하는 추세로 볼 수 있고 ‘변희수 하사’의 사회적 죽음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계층의 차이와 자이 ‘아파트 공화국’
한국 사회는 ‘강남공화국, 아파트 브랜드 공화국’이란 역설적인 신조어가 있을 정도로 강남 학군으로 통하고, 부(富)의 욕망은 아주머니들의 아파트 선호 브랜드 ‘자이’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자이 클럽이 등장한다. ‘자이 아파트’ 선호는 계층의 차이로 양극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며 한국 사회가 아파트 계급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더 나아가서는 특정 지역 아파트는 단지 평수로 부를 측정하고 단지 내에서도 강북과 강남, 부자와 서민 등의 계급으로 계층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대한민국 8학군 아파트에서도 평수와 단지(團地)의 차이로 부의 척도가 결정되고 무늬만 부자 코스프레로 불려지는 학생들은 강남이어도 ‘강북 애’로 불린다.
불편한 ‘차이의 계급’은 학교 사회에서도 묵시적인 서열로 결정되고 있고 아파트 계층 갈등은 8학군 사회를 이탈해 서울과 지역, 강남과 강북에서도 존재한다는 점인데 유난을 떠는 학생들과 대한민국 학군 중독 부모들 이야기로만 들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때 한국 사회는 중고등 학생들의 ‘명품브랜드 패딩점퍼’가 유행이 된 적이 있다. 전직 대통령 손녀가 수 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패딩을 입고 전통시장을 방문하자 시민들은 “명품패딩 입고 서민코스프레” 한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명품과 서민, 강남과 강북, 자이와 공영·서울과 지방, 부와 가난으로 삶의 양극화가 더 심해질지 모른다는 우울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 같다. 정치권에서도 오죽하면 더 많은 ‘중상층’ 사회로의 진입을 얘기하고 있지만, 어느 부동산 전문가는 “다 팔고 똘똘한 강남아파트 한 채”를 외치며 부동산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만큼 계층 차이는 집값 상승 1순위 자이아파트 평수로 통하는 시대가 되고 있는데 학교와 학급도 보이지 않는 편견과 계층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적 계층 갈등은 극 중 인물 희주를 중심으로 십 대 노동자들 인권과 노동환경의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한국 사회 십 대 노동자들은 단순 ‘알바생’으로 음식점, 편의점, 식당 등으로 업종이 한정되어 있는 데다 사업장 성격상 근로기준법 미적용 사업장이 많아 십 대 노동자들의 노동인권 문제가 심각한 위험수위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18세 십 대 노동자(아르바이트 )들 절반 이상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이중 10명 중 3명이 임금체불도 있었다고 응답하고 있다. 50% 이상이 노동인권을 침해 당한 경험을 있다고 말해 한국 사회 십 대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수준임을 드러냈다. 10명 중 1명은 적극적인 경제 활동에 참여해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扶養)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 용돈을 위한 생계형 알바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적 인식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계층의 차이’는 이 작품에서 사회 현상의 키워드로 등장한다. 극 중 인물 준호와 안나수이 손거울을 들고 다니며 준호와 사귀는 민지(조어진 분)은 일명 ‘자이 클럽’으로 분류되는 3단지에 산다. 작품에서는 특정 지역성을 두고 있지 않지만, 아파트 단지 구분은 강남과 강북, 서민과 부자, 자이 아파트 대 임대 아파트로 부의 경계로 나누어지게 현실이다. 이러한 차이의 시선은 묵시적 서열과 계층의 편견으로 존재하게 된다.
희주(윤미경 분)는 알바를 하면서 체육 교사를 꿈꾸는 십 대 노동자다. 특히 희주는 상, 중위층(2~3단지)과도 편입될 수 없으며 계층 변방으로 존재하는 학생이다. 목표를 위해 알바를 하면서도 철봉에 매달리며 체육 수행 평가를 준비하고 있다. 학급 친구(태우, 희관)는 모범생 준호를 대상으로 내재적 콤플렉스를 들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내면의 현상은 준호처럼 엄친아가 될 수 없다는 결핍 적 심리 상태로 나타나는데 희주와 준호의 수행평가 안무 발표 당일 희관은 준호 의상(옷)을 감추게 된다. “서러우면 우리 단지 살던가. 근데 개(희관) 우리 단지 살아도 내신 등급 떨어져서 안 돼. 3등급인가 4등급 하잖아” 준호한테도 계층의 서열이 내면으로 존재하고 있다.
레오타드 대 슈퍼맨의 욕망
레오타드를 입고 희주와 마룬5의 ‘슈가’ 주제음악에 맞춰 수행 평가 안무를 성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준호는 타자의 시선과 억압에서 벗어나 두 사람은 차이와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면서 동일화 된 심리적 자아 상태를 보이게 된다. 우연히 컴퓨터실에서 보게된 준호 레오타드 몸매 셀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하겠다며 준호를 수행 평가 파트너로 만든 희주이면서도 준호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희주다. 이러한 희주의 시선은 알바를 하며 십 대 노동자로 학업을 병행하며 살아가 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민주의 남자 친구 이자 모범생 준호는 계층의 차이로 느껴져 표현할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자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남자가 된다.
준호는 작품에서 레오타드를 즐겨 입으며 스스로 ‘커밍아웃’을 선언하거나 개인의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고 타자 적 시선으로써 ‘타의적 커밍아웃’이 될 수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남과 다른 취향을 드러내는 극 중 인물 준호를 성 소수자의 욕망을 취향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편견의 시선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텍스트에서 준호는 레오타드를 착용하고 즐겨 입게 된 동기를 ‘여성용 레오타드를 입고 춤을 추는 장면’을 보면서부터였고 무용을 그만두고 우울증에 있는 누나와 입시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면서 준호의 심리적 억압은 여성용 레오타드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고 내면은 자유로운 표현의 욕망으로 전이(轉移)되어 왔다. 준호는 체육 시간을 제외하고 레오타드를 매일 착용함으로써 자신감을 드러내고 거울 앞에서 몸매를 드러내 셀카를 찍는 반복적인 행위의 일탈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마치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처럼.
두 만화 캐릭터는 위기의 순간 탈인간으로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으로 변주해 영웅적 존재가 된다. 심리적 불안과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인간은 캐릭터를 미러적동일화로 느껴 복장을 착용 함으로써 ‘캐릭터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심리를 드러낸다. 슈퍼맨과 스파이더맨 복장을 즐겨 입고 영웅적 만화 캐릭터를 절대적으로 동경하는 유형일수록 내면은 미러적 투사로 동일시 되어 영웅 심리로 나타난다. 마치 부적 같은 효과로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준호의 레오타드는 여성성으로의 욕망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고자 하는 취향의 차이일 뿐이며 이러한 차이는 자의적 커밍아웃보다는 타의적 편견의 시선으로 여성성을 들어내는 준호를 타의적 커밍아웃 인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전인철의 스트리밍 씬(scene)
2022
거울에 야광 팬으로 적어 놓은 영어문장이 눈에 띄는데 “The only true currency in this bankupt world is what you share someone else when you’re uncool”, 너의 절망을 누군가와 공유 할 수 있다는 게 결핍된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다) 차이와 편견, 계층의 갈등에서 그 절망을 공유한다는 것은 이 시대 한국 사회를 향한 메시지며 그 소리는 희주와 준호를 향하고 있다. 이번 공연이 특별한 점은 극 중 인물들의 장면과 사이, 상황과 상황의 변화성을 연극적인 시공간의 흐름으로 묶어두지 않고 스트리밍 씬(scene)처럼 장면의 연속성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인철 연출의 연속적 장면화의 무대는 <날아가 버린 새>에서도 시도되면서 연극적 장치를 배제(排除) 시켜 드라마의 연속재생으로 극을 유지하면서도 무대 특징과 흐름을 연결해 극을 전달시켜 내는 연출의 참신한 시도를 느끼게 한다. 무대에 나열되어 있는 집, 극 중 인물의 방과 거실, 그리고 3자의 공간 있다고 하자. 이것을 연극적인 시공간의 변화(조명, 음향, 무대 기술, 전환)를 두지 않고 극을 연속재생시키는 현대연극적 방식을 취하면서도 연출적인 통찰(洞察)이 없으면 극은 산만해지고 모호하면서도 장면이 뭉개질 수 있는데도 전인철은 인물 배치, 움직임과 동작, 장면 변화와 공간의 활용성이 텍스트를 중심으로 극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배치해 전달하고 있다.
비의 <깡> 대 마룬 5 <슈가>
무대의 배우들은 무대구조와 대도구의 활용을 설명하기도 하고, 극 중 인물의 주어진 역할 소개를 통해 극의 감정이입과 연극적인 분위기보다 연극이라는 특성을 이해해 이야기 중심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무대 상단(上端)으로 배우들의 극 중 대사들을 투사해 배리어프리 공연으로 장애인, 비장애인 경계 없이 극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개방적인 무대로써 심플한 느낌을 주면서도 투사되는 대사의 언어는 극 중 인물, 장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극의 장면으로도 느껴지게 한다. 배우들이 두 곡의 음악(비의 깡, 마룬5 슈가)을 소개하면서 음악의 사용 방식을 덧붙이는데 곡 선택이 흥미롭다. 두 노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들어낸다. 우선 비의 깡은 남자다움, 도전, 영웅성, 스타 등으로 강렬함으로 주고 마룬 5 슈가는 사랑, 불안, 우울, 고백, 기억 등으로 가사 말을 키워드 중심으로 추려볼 수 있다. 배경 음악 선곡은 체육 수행 평가 안무 발표를 앞두고 극 중 인물 희관과 태우(이규현, 김민하 분)가 선곡했는데 화려한 영웅과 스타성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두 극 중 인물의 잠재된 욕망으로 연결된다.
희관은 준호와 3단지에 살면서도 공부와 게임도 준호한테 뒤처지는 심리적 불안감이 존재하고 태우는 2단지 사는 학생이다. 부의 경계 밖으로 있는 아파트 단지는 한국사회 부의 상류층 그룹으로 편입될 수 없는 소외계층이다. 준호처럼 ‘엄친아’가 될 수 없다는 심리적 불안과 좌절, 무의식적 결핍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상태가 동질성을 느끼는 친구와의 연대적 공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계층을 넘어설 수 없는 심리적 박탈감이 무의식적인 분노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마룬5 ‘슈가’의 선곡은 극 중 인물 희주(윤미경 분)의 선택이다. 희주는 생계형 알바를 하며 학교생활을 하는 십 대 노동자로 희주의 삶은 1, 2, 3단지 그 어디도 편입될 수 없는 계층이다. 강남과 강북, 수도권과 지방, 자이 아파트 대 공영, 공영아파트 대 임대 주택 등 한국 사회 시선으로 분류하는 계층 변방의 인물이다. 그러나 체육 교사 영길(안병식 분)한테 희주는 체대에 진학해 교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학생으로 애착을 보인다. 희주가 체육 수행평가로 선곡한 마룬5의 ‘슈가’ 가사 중 “네가 없을 때면 난 너무나 불안정해. 네가 유일한 단 하나야”라는 노랫말이 있다. 가사(歌詞)를 대상화시키는 것은 준호다.
희주에게 준호는 좋아하는 남자이자 레오타드를 입는 준호의 사회적 편견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친구)이 된다. 민지와 사귀고 있는 준호를 향한 희주의 내면은 ‘안나수이 손거울’의 소유해야 하는 욕망으로 드러난다. 안나수이 손거울을 훔친 희주는 거울을 바라본다. 마치 민지가 된 것처럼. 손거울은 민지로 동일시 되고 싶어 하는 심리와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좌절의 결핍성을 들어내고 있는데 아르바이트를 뛰며 불안전한 인생을 살아가는 희주에게 안나수이 손거울은 민지처럼 3단지에 살며 준호를 소유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으로 드러나게 된다. 희주에게 ‘안나수이 손거울’은 슈퍼맨의 복장처럼 하늘을 날아 사회적 영웅이 될 수 있는 마법 같은 도구로 비쳐진다. 그러나 준호와 그룹 수행평가를 준비하면서 차이를 공감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희주의 심리적 좌절과 결핍은 자기 치유가 됨으로써 손거울은 더 이상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적 자아를 바라보게 되는 도구가 되면서 사회적 편견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희주의 대사를 보자. “이걸로 내 얼굴을 보면 순간 또, 개처럼(민지) 되고 싶어서 쓸데없이 욕심내고 그러다 창피해지고 부끄러워지고 이제 좀 지친다.(다시 손거울을 건네며) 잘 썼다고 전해줘.” 희주 대사처럼 ‘차이’는 인간의 욕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와 절망을 공유 할 수 있을 때 편견은 용해되고 차이는 사회적 공감으로 포용 되어 계층 갈등, 양극화, 반칙과 특권, 부모 찬스의 사회 아니라 안나수이 손거울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한국 사회가 된다.
마지막 장면은 송도로 전학 가는 준호의 등장이다. 입시로, 남과 다른 차이로, 그 절망을 치유하고 구원해 줄 수 없는 한국 사회는 편견과 사회적 계층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절망을 공유할 수 없는 인간이 결핍된 세상에서는 삶의 가치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이번 공연은 사회적 다층적 의미를 전작과 변화되어 무대화 시키면서 청소년들의 사회문제와 담론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극단 돌파구와 전인철 연출의 무대 구현 방식이 매우 반갑다. 특히 이번 무대를 스트리밍씬으로 연속적 장면의 재생으로 무대화 시켜 내면서도 배우들의 진지한 태도, 연기로 표현되는 캐릭터를 사회적 메시지로 무대화 시켜 내고 있다. 특히 희주 역 윤미경은 등장과 마지막 장면까지 학교와 알바를 병행하며 살아가는 극 중 인물을 소화시켜 내 십 대 노동자의 사회적 문제를 돌아보게 했고, 배우 오해영(준호)도 레오타드의 다층적 의미를 생산적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연기가 담백했다. 2015년도에 출발한 이 2022년에 만나도 그 무대가 새로워지는 것은 극단 돌파구를 전인철의 시선과 배우들의 생산적인 사회적 탐구와 무대를 채울 수 있는 공부의 방식에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을 많은 중고등학교와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이 꼭 봤으면 하는 연극이다. ★★★★★.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