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4년만에 희생자 보상·명예회복 절차 속 추념식

입력 2022-04-03 13:59 수정 2022-04-04 09:39
배우 박정자씨가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4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유족 강춘희씨의 사연을 소개하는 추모 공연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할아버지도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세 살에 죽은 동생도 4·3희생자로 결정돼 위패봉안실에 가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 역할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는 일만 남았다.”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 유족 강춘희(77)씨의 사연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강씨는 4·3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고, 상해 후유증으로 당시 세 살이던 동생 마저 잃었다.

여섯 살이던 강씨는 자식을 잃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아남아 고된 70년을 제주4·3의 아픔 속에 갇혀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유죄를 선고 받아 목포형무소로 끌려갔던 할아버지 고(故) 강익수씨에 대해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출생신고가 안 된 상태에서 어린 나이에 숨진 남동생은 제7차 4·3희생자 추가 신고에서 4·3희생자로 결정됐다.

강씨는 “남동생과 함께 모진 매질을 당했던 엄마는 치매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동생을 잊지 않았는데 이제 위패봉안실에 가면 언제든 동생을 만날 수 있게 됐다”며 “남은 건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 강씨의 사연은 배우 박정자씨가 추모 공연 형태로 소개했다.

3일 ‘4·3의 숨비소리, 역사의 숨결로’를 슬로건으로 내건 제74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은 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에 따른 희생자 명예회복과 보상금 지급이 본격화한 시기에 봉행돼 어느 해보다 의미가 컸다.

우선 희생자 명예회복과 관련해 지난 29일 제주지법 4·3재심전담 재판부는 내란죄와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4·3 수형인 희생자 40명에 대한 직권재심 사건에 대해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들 40명은 당시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에 기록이 남은 2530명 중 일부로, 국가를 대신해 검찰이 법원에 직권 재심을 청구해 판결이 바로 잡힌 첫 사례다.

법무부는 지난해 4·3특별법 전부 개정에 따라 광주고검 산하에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을 신설해 수형인들의 명예 회복 작업을 추진해왔다.

군사재판으로 인한 재심청구는 절차가 복잡하고 당사자들이 모두 고령인 만큼 일괄적으로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앞으로 검찰은 수형인 명부에서 인적사항이 우선 확인된 이들에 대해 순차적으로 재심을 청구해나가게 된다.

같은 날 제주지법은 일반재판 등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은 희생자 33명에 대해서도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4·3특별법 개정 후 처음으로 특별재심이 결정된 수형인들로, 지난해 5월 법원에 개별적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오는 6월부터는 4·3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 절차가 본격화된다.

제주4·3 보상은 국가 차원의 실질적인 피해 회복 조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앞서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2년 정부가 처음 4·3 희생자를 인정했다. 2003년에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 발간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이뤄졌지만 4·3이라는 국가폭력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보상금 지급 신청은 오는 6월 1일부터 2025년 5월 31일까지 3년간 진행된다. 희생자는 최대 9000만원까지 보상금을 받게 된다. 대상은 4·3으로 목숨을 잃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후유장애자, 수형인 등이다.

다만 4·3 혼란기에 뒤틀린 가족관계등록부를 바로잡는 문제가 남아 있다.

당시 제주에선 부부가 자녀를 낳고 살면서도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4·3 이후에는 연좌제 피해를 우려해 희생된 부모가 아닌 친척 등에 양자로 입적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부는 가족관계 기록 불일치 사례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희생자 보상에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족관계 특례 도입 여부에 대한 대안 마련을 검토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올해부터 추가 진상조사가 시작된다.

또 희생자 추가 접수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이어지는 등 4·3희생자를 더 찾기 위한 작업도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우리의 책임이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라며 “한분한분의 가슴에도 따뜻한 봄이 피어나도록 새 정부도 노력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SNS에 올린 메시지에서 “제주는 상처가 깊었지만 이해하고자 했고, 아픔을 기억하면서도 고통을 평화와 인권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며 “슬픔을 딛고 일어선 유족들, 제주도민들께 추모와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김부겸 국무총리는 “74년전 잔인한 제주의 봄은 푸른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듯 했으나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바라는 끈질긴 외침을 통해 제주4·3은 가뿐 숨비소리내며 모습을 드러냈다”며 “이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될 때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임종 제주4·3유족회장은 인사말씀을 통해 “제주4·3 진상조사 후 19년 만에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보상 문제 등에 진척이 있게 됐다”며 “희생자와 유족에 진정한 봄을 열어준 문재인 정부에 감사한다”고 했다.

이어 “국민통합은 대한민국이 아픈 과거를 보듬고 화해, 상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며 “추념식 참석 약속을 지켜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명예회복이란 역사의 흐름이 이어질 수 있도록 새 정부가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2002년 이후 결정된 제주4·3사건 희생자는 1만4577명, 유족은 8만4340명이다.

한편 이날 윤석열 당선인은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당선인)으로는 처음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 참석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