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시위 말라” 개미들에 소송 한국거래소, 가처분 기각

입력 2022-04-03 09:14 수정 2023-02-26 18:21
31일 오후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신라젠 소액주주들이 신라젠 거래재개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거래소와 손병두 이사장이 소액주주 단체를 상대로 제기한 집회금지 가처분 소송이 최근 기각된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부는 거래소 측의 집회금지 요구가 소액주주들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거래소는 시위로 인한 손 이사장의 불편을 막기 위해 사내 법무팀까지 동원해 소송에 나섰지만 결국 기각되며 “개미들 입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자초하게 됐다.

3일 국민일보가 입수한 가처분 소송 판결문(2022카합20262)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제51민사부는 한국거래소와 손 이사장이 지난 2월 신라젠 행동주의주주모임·금융정의연대·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등 소액주주 단체 3곳에 제기한 집회 및 시위금지 가처분 소송을 지난달 29일 전부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거래소 측의 요구는 (소액주주들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내용”이라며 기각 이유를 밝혔다.

앞서 신라젠 행동주의주주모임 회원 10여명은 지난 2월 서울 서초구에 있는 손 이사장 자택 인근에서 두 차례의 피켓 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당시 집회에서 “신라젠에 대한 거래정지 조치가 부당하다”며 조속한 거래 재개를 요구했다. 그러자 한국거래소와 손 이사장은 같은 달 11일 “소액주주들이 손 이사장의 자택 앞에서 거래소 측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 모욕, 명예훼손을 하는 방식의 집회·시위를 벌여 손 이사장의 명예권과 사생활의 평온 등을 침해하고 있다”며 집회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거래소 측은 가처분 소송에서 “언론·집회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며 “휴식권과 사생활의 자유가 고도로 보장돼야 할 개인 주거지 인근에서 벌이는 시위는 정당한 권리행사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당시 거래소 측은 “이 같은 시위가 용인되면 향후 다른 종목을 보유한 소액주주 단체들도 유사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거래소와 손 이사장의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액주주 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소액주주 단체들이 손 이사장의 자택 인근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인정되나, 시위가 상당히 온건한 수준으로 진행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거래소 측은 소액주주 단체가 “손 이사장이 신라젠 상장폐지 결정을 고의로 지연시켜 주주들을 부당하게 괴롭히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악의 근원이다” 등 명예훼손성 발언을 했다며 손 이사장 자택 인근에서 이 같은 내용의 시위를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거래소 측이 제출한 증거자료를 보면 정작 소액주주 단체들은 자택 인근 시위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거래소 측이 주장한 시위 내용 중 자택 인근 시위와 관련됐다고 인정된 것은 “한국거래소의 신라젠에 대한 거래정지가 부당하다. 거래를 재개해야 한다” 뿐이었다.

소액주주 단체들이 손 이사장 자택 앞에서 두 차례의 시위만을 벌인 뒤 더 이상의 시위를 벌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참작됐다. 거래소 측은 신라젠에 부여된 개선기간(6개월)이 종료되는 8월부터 다시 시위가 재개될 수 있다며 집회금지를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해당 시점까지는 5개월 정도의 기간이 남은 만큼 (자택 인근 시위가) 재발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필요성이 인정돼야 하는데, 현재 시위가 중단된 만큼 가처분 실익이 부족하다는 판단이다.

한편 이번 가처분 소송에서 거래소와 손 이사장을 대리한 것은 조재우·김민교 변호사로 파악됐다. 이 중 김 변호사는 현재 한국거래소 법무실장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손 이사장이 사내 법무팀을 동원해 본인 자택 인근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막도록 했다는 점에서 월권을 행사한 게 아니냐는 비판은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이번 가처분 소송은 손 이사장의 거래소 직무수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생했기에 법무팀이 대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손 이사장은 이에 대해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