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피란민 돕는 이유? 너무 큰 고통을 겪고 있으니까!”

입력 2022-04-02 15:20 수정 2022-04-02 15:33
지난 1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에 있는 체코형제복음교단(ECCB) 디아코니아 사무실에서 만난 이 단체 임원진. 크리스티나 암브로조바, 마르틴 발차르, 페트르 소발리크, 루치에 슬라모바, 슈테판 브로드스키(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왜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을 돕는 겁니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체코의 사역자들은 기가 막히다는 듯 일제히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러더니 한 사역자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 뒤 이렇게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피란민을 섬겨야 할 이유 자체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지난 한 달여간 상황이 정말 급박하게 돌아갔거든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어요.”

지난 1일(현지시간) 이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자리는 체코 프라하에 있는 체코형제복음교단(ECCB) 디아코니아 사무실이었다. 이날 이 단체 임원진은 한국교회봉사단 관계자들과 1시간 넘게 회의를 했다.

ECCB에 따르면 현재 체코에 머무는 우크라이나 피란민은 30만명에 달한다. ECCB는 체코교회 300여곳이 소속된 체코의 대표적인 교단 중 하나로,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마자 피란민 사역에 뛰어들었다. 전쟁 발발 첫날에만 ECCB 교회 46곳이 피란민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현재는 130여곳이 피란민 1200여명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이웃의 많은 나라가 ECCB의 사역을 거드는 중이다.

이 밖에도 ECCB가 벌이는 사역은 한두 개가 아니다. 전쟁이 장기화될 수도 있는 만큼 피란민들이 체코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굴 수 있도록 피란민을 상대로 체코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숙박 시설을 갖추지 못한 교회들은 성도들이 직접 벼룩시장을 열어 피란민들이 입을 옷을 구하기도 한다. 피란민들이 직접 음식을 해먹을 수 있게 각종 주방 기구를 지원하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ECCB 디아코니아 행정 실무를 총괄하는 마르틴 발차르씨는 ECCB가 벌이는 다채로운 사역들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교회는 피란민들과 조그만 카페를 창업할 계획까지 만들어 놓은 상태예요. 피란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죠. 체코 방송사들에는 피란민을 위한 체코어 교육 콘텐츠를 방영해달라는 요청도 해놨습니다. 피란민들을 돕는 방안들은 무엇일지 정부와도 긴밀히 논의하고 있어요.”

이날 회의의 목적은 한국교회나 세계교회가 피란민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ECCB 디아코니아 임원들은 “그런 질문에는 정확한 답변을 드리기 힘들다”고 잘라 말했다. 피란민 사역이 이뤄지는 ‘현장’의 요구가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진행하면서 피란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얼마간 가늠할 수 있었다. 가령 대다수 교회가 피란민들을 위한 주방은 갖추고 있지만 세탁기는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노트북을 비롯한 전자 기기도 마찬가지였다. 발차르씨는 “많은 피란민이 한 손엔 현금화가 가능한 보석이 담긴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었다”며 “컴퓨터처럼 아이들 교육에 유용하거나, 현지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전자 기기가 이들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ECCB를 통해 피란민 사역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다. 체코의 사역자들은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자원봉사자들의 피로감이 누적돼 피란민 사역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ECCB는 전쟁이 길어지면 현재 400만명 수준인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1000만명 규모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CCB 디아코니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는 페트르 소발리크씨는 “체코 정부 차원에서 자원봉사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체코의 사역자들은 한국교회가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거듭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도 했다. ECCB 이사인 슈테판 브로드스키씨는 “한국과 체코의 교회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관계이니 두 나라의 교회가 협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체코는 과거에 전쟁을 겪을 때마다 이웃 국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서 “지금은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갚아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프라하(체코)=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