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중앙화 이념 아래 규제 없이 국경을 넘나들던 암호화폐 시장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코인 금융실명제’로 불리는 ‘트래블룰(자금이동규칙)’ 도입이 계기가 됐다. 투자자들은 코인을 송금할 때마다 정보를 제대로 기입했는지, 해외로 제때 보낼 수 있는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새로운 제도를 자신에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신경전을 펼친다. 세계 최초로 국내에 도입된 트래블룰을 둘러싼 잡음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첫 발 딛은 코인 금융실명제
트래블룰의 목적은 가상자산의 흐름을 추적해 자금세탁 등 범죄를 방지하는 데 있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전 세계에 도입을 권고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3월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이 개정되며 도입, 지난달 25일부터 시행 중이다.
가상자산 거래소들에게는 100만원 이상의 코인 송금 시 보내고 받는 이용자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할 의무가 생겼다. 검은 돈이 오가거나 국내 자금이 무분별하게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감시·통제하기 위해서다. 이 정보를 기록하는 시스템이 ‘트래블룰 솔루션’이다.
국내에서 개발된 트래블룰 솔루션은 두 종류가 있다. 두나무(업비트) 자회사 람다256이 개발한 ‘베리파이바스프(VV)’와 빗썸·코인원·코빗이 합작해 만든 ‘코드’다. VV는 분산 프로토콜 연계 방식을, 코드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연동 안 된 ‘빅 4’, 반쪽의 트래블룰
트래블룰이 시행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솔루션은 아직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대형 거래소 간에도 연동이 채 안 된 탓이다. 시장 점유율 1, 2위 거래소인 업비트에서 빗썸으로 송금을 할 수 없다. 당초 제도 시행 전까지 솔루션을 연동하기로 했던 VV와 코드는 마감 기한을 한 달 후로 미뤘다. 심지어 코드를 만든 3사 간에도 연동이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솔루션 간 기술적 차이가 연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양사 솔루션을 모두 사용하기로 한 중소형 거래소 관계자는 “두 솔루션이 생각보다 매우 다른 구조로 짜여 있다. 영어와 아랍어의 차이만큼 달라 호환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거래소 간 시장 선점을 위한 주도권 다툼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기록되는 정보를 취합하면 누가 언제 어떤 종목을 많이 보유하는지, 자산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향후 사업에 쓰일 수 있는 민감한 고객 정보다. 다른 거래소 관계자는 “업비트와 코드 간에도, 코드 내부에서도 솔루션을 각 사에 유리하게 적용하려는 알력 다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국내에만 적용된 규제에 이용자는 불편
트래블룰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거래소에도 적용된다. 개인 지갑으로의 송금은 특금법상 규제 대상은 아니지만 업계에서 자금세탁방지를 위해 자율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코인이 통제 없이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거나 감시가 힘든 개인 지갑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미국·유럽 등의 대형 거래소 중에는 트래블룰 솔루션을 도입하지 않은 곳이 많아 입출금이 어려운 상황이다.
금융당국은 임시방편으로 송·수신인이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자금세탁 위험이 낮은 해외 거래소에 한 해 송금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국내 거래소가 위험도를 저마다 평가·심사해 송금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셈이다. 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별다른 가이드라인도 주지 않고 제도만 도입한 것”이라며 “관리·감독이 미진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이른 규제가 국내 시장을 고립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래블룰 시행 전후 비트코인이 해외보다 국내에서 2% 이상 저렴하게 거래되는 ‘역 김치 프리미엄(역프)’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정석문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흐름이 파악 안 되는 돈은 아예 시장에 들어올 생각을 말라는 것”이라며 “자꾸 한국 시장의 벽을 높이면 역프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완의 규제에 투자자들은 불편을 호소한다. 온라인 투자 커뮤니티에는 “송금 심사에만 몇 시간씩 걸린다” “오입금 되면 어쩌냐”는 불만 섞인 게시글이 올라오고 있다. 가상자산 데이터 업체 쟁글은 “복잡한 송금 절차와 엄격한 규제는 개인에게는 높은 허들”이라며 “막 성장하기 시작한 NFT·디파이 등 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